완연한 봄이다. 매섭던 겨울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기억이 어제이건만 어느덧 대지는 녹고 산과 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색깔로 덧칠해 가고 있다. 도시 곳곳은 신록의 계절을 자랑하며 물오른 나무들로 여기 저기 하나 둘 꽃망울을 터트려 가고 있다. 특히 벚꽃은 특유의 화려함으로 재빨리 꽃을 피워 한껏 자색을 뽐내는데 그 현란한 아름다움이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때마침 경기도가 '벚꽃 동산 작은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청사를 개방하고 각종 이벤트를 곁들여 시민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한층 높여주는데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열흘 남짓 주·야간 열리는 행사를 즐기러 나오는 주민들은 흐드러진 벚꽃을 바라보며 탄성과 함께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데 대해 간만의 여유를 만끽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며 열광하는 군중들을 바라보노라면 무심코 넘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유난히 벚꽃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말 그대로 봄의 화신쯤으로 여기고 반기는 것일까. 어수선한 상념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최근 들어 전국 산야는 물론이고 도심지 곳곳에 군락을 이루며 심어지는 벚나무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는 추세다. 전국 대부분 지자체들은 가로수와 관상수를 앞다투어 벚나무로 수종갱신을 해가며 각종 축제와 연결해 내고장 알리기에 고군분투 하기도 한다. 이때면 상춘객들도 뒤질세라 벚꽃구경에 한마음이 된다.

인터넷에 올라온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벚꽃축제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너무 도식적이면서 특색없는 획일적인 행정에 씁쓸함이나 나무람에 앞서 왜 이러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수가 없다. 모두가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듯싶다.
 
이쯤되면 선조들의 시상에 끊임없이 등장하던 개나리, 진달래, 목련, 유채꽃 등은 풍류에서 사라질 판이다. 물론 제주도의 유채꽃축제를 비롯해 나름대로 또 다른 절경이 있다. 그러나 전국을 들끓게 하는 벚꽃에 비해 관심밖으로 밀려나 갈수록 명성 유지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마치 구색갖추기 곁다리 행사같이 비쳐지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다. 우리생활 주변에서 온갖 세풍을 견디며 은근한 멋과 친근감을 주던 꽃들이기에 아쉬움이 더할 수밖에 없다.
 
무궁화 얘기는 접어두자 거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잊혀져 기껏해야 책이나 TV프로 시작과 끝 화면에 잠깐 한 번씩 보여주는 정도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지난날 우리 국토에 무궁화를 많이 심자며 발바닥이 닳토록 이리 저리 뛰어 다니시던 어느 할아버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제사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듯한 심정이다.

세계화 물결속에 무궁화에 담긴 역사적 뜻이 잊혀져만 가는 현실이 아닌가 걱정되는 순간이다.
 
한편으로는 화려함으로 치장하려는 지자체 나름대로의 판단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우리 국토에 벚나무가 무섭게 번지는 데는 우려를 안할 수 없다. 일명(日名) 사쿠라꽃을 마주보며 편치만 않은 심정도 헤아려 줄 만한 이유가 있다. 벚꽃은 일본을 상징하는 그들의 국화로 지난날 우리 민족이 감내한 수치와 치욕을 떠올리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오래전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칭하고 벚나무를 심어 한때 밤벚꽃놀이가 우리의 봄놀이문화를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에는 우리 나라 심장부인 국회 주변이 온통 벚꽃으로 물들어 윤중제 축제를 수놓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40년 역사 진해군항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놓고 대표적 벚꽃명소로 꼽혀 각지에서 100만명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니 결코 웃지못할 일이다.
 
그렇다고 유별스럽게 단순히 보는 것을 탓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위적일 바에는 균형있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땅에 봄의 대표적 화신이 하필이면 벚꽃이여야 하는지 곰곰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에 사는 우리가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그저 벚꽃에 취해 희희낙락 유희나 즐긴다면 혹여 자라는 아이들에게 정신적 유산은 무엇을 남길 것이며 선조들에게는 씻지못할 한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한번쯤 깊이 되새겨볼 때가 됐다./윤인철(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