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대화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 인해 전국적 국민 갈등구조가 증폭되면서 결론 없는 쟁점을 확대 재생산 하는데 국력이 소진되고 있다. 이를 국가개조를 위한 성장통이나 통과의례 쯤으로 여기는 시각이 있지만, 대다수 국민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정치권은 국가운영 방향을 놓고 보수와 개혁 세력이 대치 중이다. 그리고 사회 각 분야는 보_혁 구도 아래에서 각론마다 찬-반 그룹을 형성해 양보 없는 대결에 휩싸여 있다. 보-혁, 찬-반 진영 모두 겉으로는 국익이나 공익 실현을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문제는 국익과 공익 실현을 위한 방법과 수단에 대해 서로 '절대 선'을 독점하려는 태도다. '나는 선(善) 너는 악(惡)'이라는 위험천만한 선악 구분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니 매듭이 풀릴리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개혁'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걸었다. 불행한 것은 노 대통령의 개혁 지지세력이 대부분 장외 세력이라는 것이다. 친정(?)인 소수 여당 민주당에서도 개혁 친위 세력은 소수다.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과 대화를 통해 국정을 이끌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상생의 정치를 강조하며 야당과의 대화 정치를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라크 파병동의안 처리까지는 잘 나가나 싶더니 결국 '고영구 국정원장 청문회'가 사단이 됐다. 노 대통령은 국회 정보위의 '국정원장 고영구 부적절' 의견에 월권이라고 발끈했고,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월권 발언이 월권이라며 대응 수위를 한껏 높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월권 시비는 의미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이나 국회의 권한 모두 국민이 위임한 권한이다. 서로 우열을 다투라고 준 권한이 아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의 의사를 소통시킴으로써 국리민복을 실현하라고 준 권한이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를 위해서 권한을 다투는 것인가.
엊그제는 민주당 신주류가 개혁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선거를 통하지 않은 정계개편은 선거로 확정된 정당체제를 인위적으로 전복한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그나마 현재의 정치혼란을 진정시킬 정치적 필요, 혹은 개혁 추동 세력의 결사를 바라는 국민여론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신당창당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창당 선언 자체가 매우 반민주적이라는 점은 문제다. '정치개혁, 국민통합 세력'의 대결집이 신당의 목표라는데, 그렇다면 신당 불참 세력이나 신당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은 정치개혁을 반대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세력이라는 주장인지 묻고 싶다. 선한 가치를 독점하고 상대를 괴뢰로 여기며 전선(戰線)을 뚜렷이 하는 정당을 창당하겠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말장난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말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정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신당을 창당한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높은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정치가 이 모양이니 사회 전분야가 '선(善)을 독점'하기 위한 찬-반 충돌로 들끓고 있다. 전교조 대 반(反)전교조의 충돌은 대표적이고 아주 흉악한 사례다. 전교조나 반전교조나 모두 교사의 권익과 교단의 민주화를 통한 참교육 실현을 지향한다지만 들여다 보면 서로의 몰락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추구하는 가치가 같다면 서로 동지애를 느껴야 할 텐데 그들은 대화하지 않는다.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를 보라. 봉투(촌지)를 밝히는 '교사' 김봉두가 산골 아이들의 동심과 동네사람들의 인심에 교화돼 '선생님'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이제 교화나 교정의 대상이 학생이 아니라 '교사'라는 것이다. 교사가 희화(戱畵)의 대상이 된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전교조와 반전교조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 따지고 보면 공무원 노조가 시장에게 소금을 뿌린 사건이나, 사스환자 격리병원 하나 지정하지 못하는 현실은 심각한 대화결핍증이 낳은 사회병리 현상이다.
윈스턴 처칠은 말년에 귀가 어두워졌다. 정적(政敵)인 애틀리는 말이 빠르기로 유명했는데, 그는 의회에서 중요한 발언을 할 때면 처칠을 위해 천천히 반복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처칠은 애틀리가 착석할 때 반드시 '고맙습니다'라고 사의를 표했다. 민주적 인격과 제도의 성공적 발현이 농축된 장면이다.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며 서로 사의(謝意)를 표할 줄 알아야 민주정치가 가능하고 민주적 삶의 질서가 잡힌다. 말 같은 말이 없어 위기인 지금, 진정한 말 문(門)을 열어 상생의 지혜를 소통시켜야 할 때다. /윤인수(논설위원)
말 문(門)을 활짝 열자
입력 2003-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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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3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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