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대사에 있어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된 감격적인 순간들을 두 번 경험했다. 한번은 88 서울올림픽이었고 또 다른 한 번은 지난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월드컵 축구대회였다. 88서울올림픽이 한국인의 저력을 지구촌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면 월드컵 축구는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실력 그리고 그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킨 기회였다. 더욱이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한반도에서 해냈다는 데 더 큰 보람과 감격이 있었다.

특히 월드컵 4강 신화의 감격은 지금도 가슴에 용솟음치고 있다. 전국을 붉게 물들인 응원 물결은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라는 함성은 한국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의 가슴을 감동시켰다. 그것은 진실로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다. 온 사회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젊은이들은 한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했다. 우리 생애에 그처럼 환희에 찼던 한 달이 또 있게 될지 의문스러울 만큼.

지난해 이 무렵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이 그토록 엄청난 기적의 드라마를 연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야말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세계 축구의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친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보면서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응원하던 시민들은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물결 속에 춤추고 노래했다.

한·일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이념과 지역, 계층간 갈등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이루었다. 전국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훌리건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폭력적인 응원과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질서정연하고 열광적인 모습의 응원은 해외 언론들이 극찬했고 우리 스스로도 놀라운 체험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코 끝이 '찡'할 정도다.

그래서 당시 정부는 어려워진 경제현실과 국내·외 여건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의 하나로 '포스트 월드컵'대책을 세우고 월드컵을 통해 얻어진 '코리아 브랜드'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 국민의 결집력을 경제,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의 1년을 되돌아보면 착잡한 마음이 앞선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 것을 억누를 수가 없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갈등과 충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계기로 조성된 사회적 상승 분위기를 이어나가고 4조원에 이르는 경제효과를 극대화하자던 '포스트 월드컵' 대책은 온데 간데 없다.

1년 전 응원의 함성으로 지축을 흔들던 10개의 월드컵 경기장들은 사후활용대책 없이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미운 오리 새끼'가 된지 오래다. 휘장권과 입장권에 얽힌 비리가 들통나면서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다. 월드컵 당시의 충만했던 통합 에너지와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갔는가. 월드컵 세대들의 저력은 또 어디로 갔는가.

대구지하철 참사로 수백 명의 목숨이 단숨에 날아갔고 화물연대파업, NEIS를 둘러싼 교육계의 정면충돌, 로또와 부동산 투기로 얼룩진 사회, 정쟁과 당권경쟁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의 대립에서 희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이 지경이 계속될 것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한·일 월드컵이 우리에게 던져준 값진 의미와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월드컵 세대'들의 저력과 기성세대 모두가 월드컵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한 당시 이방인 감독 거스 히딩크의 개혁의 메시지를 정치권이나 경제계에서 도입하자던 취지들도 이제 다시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때다.

새로운 리더십으로 희망과 자신감을 되살리고 힘찬 내일을 가꾸어 나가지 않는다면 월드컵 4강 신화는 빛바랜 추억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제 정치지도자나 사회지도층이 살신성인해야 한다. 소모적인 논쟁에 언제까지 매달려서는 곤란하다. 경제인과 노동자도 이해관계에서 초연해지자.

'네편 내편'을 가르는 일도 안된다. 2002년 6월 '월드컵의 함성'을 되새긴다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들은 일순간에 날아갈 것이다. 감격과 추억을 살려내자. 국민들이 다시 한 덩어리가 되자. 국가를 위한 희망의 불꽃을 다시 지피는데 모두가 힘을 모으자./이준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