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정(共和政) 제4대 대통령 카르노(Carnot) 때 얘기다. 파리의 어느 손꼽히는 부호가 조야의 명사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물론 카르노 대통령도 참석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으려고 상석으로 다가간 카르노는 자신의 육안을 의심했다. 최고의 상석엔 철도회사의 기사장(技師長)이 버티고 앉아 있고 다음 자리엔 유명한 문학자, 그리고 대학 교수 순서에다가 겨우 16번째 자리에 가서야 '대통령 카르노'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얼굴이 노래진 대통령을 대신해 좌중의 한 사람이 '몹시 부당한' 좌석 배치의 연유를 항의하듯 물었다. 그러나 주인은 자신감 넘치는 톤으로 말했다.
“상좌의 기사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전문적인 기량을 평생 쌓아올린 분입니다. 그 다음의 문학자, 화학자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무엄한 말씀 같지만 대통령이야 당장 그만두신다 해도 대신할 분들이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전설 같은 얘기에 코웃음을 치지 않을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세계 전·현직을 통틀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을 두 번 만나는 동안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한 번밖에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해서 '빌 C'보다는 '빌 G'가 더 세다는 세속의 입방아에도 클린턴은 힝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더구나 래리 피플스라는 한 사내가 술집에서 “클린턴과 그 마누라는 미국의 조상과 우리에게 수치스런 존재다. 그들을 없애버릴 것이다”고 소리를 치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체포, 기소(94년 1월14일)가 되는데도 말리지 않은 그였다.
그런 별난 죄는 아직도 도처에 있다. 프랑스의 르 몽드지가 95년 '모로코의 하산 2세 국왕(99년 사망) 측근들이 마약 밀매에 관련됐다'는 기사를 썼다가 모로코 정부의 항의를 받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국가원수모독죄'로 기소를 당한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는 작년 6월25일 “1881년 제정된 '국가원수모독죄'는 시대착오적이며 언론자유와 관련된 권리를 침해한다”고 땅땅땅 판결, 르 몽드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 하지만 그런 시대착오적인 모독 죄는 '가장 시대에 맞는다'는 듯 끊임없는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바로 엊그제 자신에 대한 비판 방송을 금지토록 하는 법안을 의결한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비롯해 언론 탄압을 일삼는 그 많은 국가 원수를 일일이 들 것도 없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엊그제 어느 국제회의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한데 짓궂게도 그런 모습을 2∼3초 방영했다 해서 그 나라 국영 TV 총재의 목이 날아가버렸다.
희한한 것은 DJ 정권 때도 그런 죄목이 거론됐다는 점이다. '국가원수모독죄'란 글자 그대로 임금이 주인인 '군주(君主)'시대나 어울리는 죄명이지 잡초든 요초(妖草)든 약초(藥草)든 백성이 주인인 '민주'시대엔 아니다.
민주국가의 '民'과 대통령은 오히려 '대통령→민'의 주종 개념에 걸려 있다. 대통령의 서열이 최수위(最首位)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한 나라의 상징적인 대표성 서열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계(斯界)의 직능별 수위는 전혀 아니다. 한 해 몇 억 달러의 자선단체 기부금을 쾌척하는 착한 짓에다가 미국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는 '빌 G'가 왜 '빌 C'만 못하다는 것인가.
요즘 언론인들에게 '국가원수모독죄'를 씌우고 싶어 몸살이 나는 노무현 대통령 측근 인사가 한 둘이 아닌 것 같다. 언필칭 국가 원수를 모독한다는 것이고 대통령을 무자비하게 짓밟는다는 것이고 사디즘에 걸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긴 “언론이 발목을 잡아 안된다” “대통령을 짓밟는 기사를 이토록 새까맣게 신문에 처바를 수 있는가” 등 분통을 삭이며 언론과 싸우는 대통령의 언론 코드에 맞추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언론인이 그렇게 '말도 안되게' 함부로 대통령을 모독하고 짓밟는다는 것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하품하는 모습까지 신문에 나듯이 대통령이란 누가 뭐래도 그 나라의 최대, 최다 뉴스 메이커다. 따라서 그의 일언반구와 한 동작, 한 폼이 모두 세인의 주목을 받게 돼 있고 기사 감이 되게 마련이다.
더구나 '해타(咳唾)마다 성주(成珠)'라고 했던가, 기침 하나, 침방울 하나가 모두 구슬을 이룬다고 했듯이 노 대통령이야말로 입만 열었다 하면 그의 한 마디, 반 마디가 모두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고 흥미로운 논란거리가 되니 얼마나 재미있는 대통령인가.
그러다 보니 자연히 노 대통령 기사로 넘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유권자의 절반은 그를 택하지 않았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가 있다면 노무현을 덜 사랑하는 모임인 '노덜사모'도 있을 게 아닌가./오동환(논설위원)
'노덜사모'와 재미있는 대통령
입력 2003-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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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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