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교육의 현장에서는 학생들의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고 신장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과 방법이 동원된다. 체벌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체벌이란 매를 때리는 것 만이 아니다. 꿇어 앉히기, 일어서 있기, 팔 들고 서있기 등 피교육자의 교정(矯正)을 위해 신체에 가하는 행위 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순수 교육적 체벌이 아닌, 비교육적 구타 또는 폭력은 어떤 경우에든 교육 현장에서 단연코 배격돼야 함은 물론이다.

순수 교육적 체벌이라도 그것이 교육에 무효, 무익하다면 교육 현장에서 철저히 배제돼야 하겠지만, 교육에 유효, 유익하다면 당연히 교육의 한 방법으로 인정돼야 한다.
 
요즘 들어 체벌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마음이 씁쓸하다. 수원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주의가 산만한 어린이의 통제가 어렵자 담임교사가 학급 간부들을 시켜 차례로 뺨을 때리게 했다고 하여 야단이다. 수년 전 교육차원의 체벌은 정당하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었지만 체벌의 방법치고는 너무 했다는 생각이다.

인천의 한 사립초등학교에서는 체벌교사와 이를 옹호하던 교사에 대해 학교측이 사표를 수리하자 이제는 학부형과 어린이들이 사표수리는 '너무하다'며 전학도 불사하겠다는 기세로 농성을 벌인다고 한다. 급기야 경남 창원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수업도중 6학년 어린이를 마구 때린 57세의 담임교사가 부모의 고소로 인해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공자(孔子)는 교육에서의 체벌을 이렇게 말했다. “가엾게 여기는 아이에겐 매를 많이 때리고, 미운 아이에겐 밥을 많이 주어라.” 여기서 ‘가엾게 여기는 아이’는 잘 되어야 할 아이인데 어쩐지 잘 안되고 있어서 걱정되는 그런 아이를 가리킨다.

성경에도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니,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겐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고 했다. 성인(聖人)들도 체벌을 인정했다고나 할까.
 
한 자녀 시대에 자기 중심적 사고로 자란 요즘 아이들은 어지간해서 부모나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윤리의식과 인성이 가정교육에서 형성되었지만, 요즘은 TV와 컴퓨터 그리고 과외에 시간을 다 빼앗겨 가정교육이 없는 실정이다. 과거에는 자녀가 ‘부모 말은 안 들어도 선생님 말은 듣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교 교육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이 선생님 말씀도 듣지 않는 시대, 나아가 체벌하면 대들거나 고발이나 하려는 시대로 바뀌었다. 수십년간 쌓아 올린 교육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하루 아침이지만, 그것을 원상으로 되돌리는 데는 상상을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교원, 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학교바로세우기실천연대 조사에 의하면, 학생 체벌에 대해 ‘적절한 범위내에서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체벌은 중요한 교육방법의 하나일 수도 있다. 신상필벌(信賞必罰), 일벌백계(一罰百戒)는 교육의 기본 원리이기에 일부에서는 학생의 인격이나 자존심에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사랑의 매’라는 의미의 교육적 체벌을 합법화하자고 하기도 한다. 이렇듯 학생 체벌문제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교육현장의 오랜 숙제다. 지금은 교육개혁 차원에서 체벌이 전면 금지된 상태지만 교육당국마저도 체벌에 관한한 '인정→불인정'의 시행착오를 거듭해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벌문제에서 어른들이 놓치기 쉬운 것이 학생들의 사고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스승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교사들은 당장 편한 체벌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이같은 변화를 읽어내고 교육에 반영해야 한다. 학부모가 맡아야 할 몫도 크다. 가정에서도 ‘사랑의 매’를 아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 예절과 질서의식을 가르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가 체벌이고 어디까지가 '사랑의 매'냐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이제 체벌에 있어 학생과 학부모들이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의 수립과 대안 프로그램의 개발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사 스스로가 감정을 억제하고 '사랑의 매'라는 한계를 분명하게 그어야 한다./이준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