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환란(換亂) 때 이런 속설이 나돌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련한 밥솥에다 박정희 대통령이 쌀밥을 지었는데 엉뚱하게도 전두환 대통령이 그 쌀밥을 맛있게도 잡수셨는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뭇 사람의 입에 군침이 돌도록 어떻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어쩌다가 그만 그 무쇠 솥을 IMF의 깡드쉬, “깡통이나 드슈(차슈)”라는 뜻이 아닌가 싶은 기묘한 이름의 사나이한테 빼앗겨버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배꼽 움켜쥘 우스개 소리란 말인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건국(建國) 밥솥을 어렵사리 만들긴 만들었어도 그 밥솥에다 쌀밥 한 번 제대로 못 짓고 꿀꿀이죽, 시래기죽, 강냉이죽만 쑤어오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해가며 불철주야 노력으로 기름기 자르르한 쌀밥을 짓긴 지었어도 당신께선 제대로 잡수시지도 못한 것을 숟가락만 들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맛있게 잡수셨고 노태우 대통령은 노릇노릇한 누룽지까지 아삭아삭 처치해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YS는 IMF 사태로 대한민국의 밥솥 자체를 빼앗겨버리고 말았다는 비유였다.
 
그럼 15대 DJ의 사명은 무엇이었던가. 그야 YS가 어 어, 비명 한 번 올릴 사이도 없이 빼앗겨버린 대한민국 무쇠 밥솥을 찾아오는 일이었고 그는 무난히도 그 일을 해내 천둥 같은 국민의 박수를 받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취임 초의 '제2의 건국'이라는 슬로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2의 건국'이라니! 그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건국한 이래 1998년 두 번째로 나라를 바꿔 세우겠다는 뜻인가 무엇인가 묻고 싶었다.

그런 뜻이었다면 건국이래 50년 현대사가 일말의 가치도 없는 과정이었고 더는 두고 볼 수 없이 형편없는 꼴이었다는 뜻이던가. 그렇다면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과 민족 부흥의 아버지인 박정희는 물론 나름대로 임기 중의 공로를 인정받을 역대 대통령이 지하에서, 지상에서 얼마나 고약하게 심기가 뒤틀릴 것인가.
 
물론 '제2의 건국'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그야말로 '치국(治國)'과 '통치'를 전혀 딴 세상처럼 잘하겠다는 다짐의 소리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오만에 찬 도그마가 지나쳤던 게 아닌가. IMF 사태로 빼앗겼던 밥솥을 찾아온 일 말고 도대체 무슨 치국, 통치의 결과가 어떻게 혁혁했는가. 쥐도 새도 모르게 5억달러니 10억달러니 엄청난 면담료(面談料)를 예납하고 평양 하늘로 날아가 김정일 위원장을 껴안은 '6·15 포옹'과 퍼주고 또 퍼준 '햇볕정책' 그것이 전부였지 않은가. 그런데 선샤인(sunshine)정책이든 솔라(solar) 정책이든 그 우주, 태양 차원의 어마어마한 '햇볕정책'에 의해 아무리 햇볕을 끼얹고 퍼부어도 저들의 그 두껍고도 질긴 이념과 체제의 털 코트를 벗으려 하던가, 소름끼치는 핵 조끼를 벗으려 하는가.
 
지금은 어떤가. 드디어 마지막 단계인 공포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다는 것이 아닌가. YS 정권 때는 '갱제'라는 밥솥만 빼앗겼을 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正體)는 여전했고 정치, 사회, 문화 모두가 말짱했고 이 상산 낙화유수 한결같이 의구(依舊)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까딱하면 무모한 핵전쟁에 휘말려 이 나라 본체(本體)의 기둥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의 뾰족한 해법이든 뭉툭한 해법이든 기대할 수 있는가.
 
도무지 미덥지가 못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게 이구동성이다. 돼지저금통으로 모금한 50억원으로 깨끗한 대선을 치렀던 게 아니라 그 돈은 4억5천만원에 불과했고 200억원을 별도로 모금했다는 설은 차치해 두자. 북핵 문제만 해도 미, 일 등 우방은 이미 제재에 돌입했는데도 '대화 해결'만 되뇔 뿐 해법이 없지 않은가. 그는 또 일본에 가서는 공산당이 허용돼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온다고 했고 중국에 가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을 존경한다고 했다.

다원화한 사회의 이상적인 민주주의야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처럼 공산당과의 공존 그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 상황은 도무지 아니고 절대 아니다. 그는 또 중국 공산당 교주이자 1966년 문화혁명의 홍위병 와이어풀러(wirepuller·조종자)인 마오(毛)를 존경한다고 했다. 1950년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김일성을 도와 중공군 100만 대군을 지원, 통일을 방해함으로써 유엔으로부터 침략자로 규정받은 죄인을 존경하다니! 이제 노정권 5년이 너무나 걱정스럽다.

설마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질서와 체제가 깨져나가고 엉뚱한 '제2의 건국'이 도래하는 건 아닌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밥통만 깨졌던 IMF 때가 차라리 '아 옛날이여' 호시절이었던가./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