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의 남쪽 지역에 있는 보타닉 가든(Auckland Regional Botanic Gardens)에는 공원의 곳곳에 오래된 나무 벤치들이 놓여 있다. 백여개가 넘는 나무 벤치들은 한결같이 등받이마다 기부자 명판(名板)을 달고 있는데,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은 무심코 쉬어가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기부자 명판에는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과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마른 이끼가 잔뜩 낀 나무 벤치의 가치야 돈으로 따지자면 몇 푼 되겠냐마는 벤치에 머물다 갈 여러 사람들의 휴식을 위하여 기꺼이 내놓은 기부자의 따뜻함은 돈의 가치로 판단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자선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이 슈퍼마켓 앞이나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거리에서 모금활동을 하는 모습을 일년 내내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집집마다 방문하거나 우편을 통해서 기부금을 청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학교는 당사자인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모금 활동을 벌여 모자라는 경비를 충당한다. 이러한 다양한 모금 활동이 연중 가능한 것은 각종 기부금에 대해 사람들이 인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작은 보탬에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일 터이다. 뉴질랜드에서 기부는 일상 이루어지는 실천이며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문화다.

이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부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잘아는 수재의연금을 거둘 때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할 때도 월급쟁이들은 자발적이기 보다는 일괄적으로 공제하곤 해서 정작 중요한 기부자의 마음은 담을 길이 없다.

몇백원에서 몇천원씩을 모아 전달되는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 정성이 사진과 함께 실린 굵고 큰 활자체의 고액 액수에 눌려 신문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경쟁이나 하듯 벌이는 모금 현황은 오히려 기부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고 오로지 기부금의 액수에만 신경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소년소녀가장에 대한 후원사업으로 시작한 시민들의 기부활동은 ARS 등을 통해 활성화 되고 있는 반면 이전에는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유도하는 비영리조직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웃돕기성금을 관장하는 사회복지 공동모금회가 투명하고 책임 있는 모금과 배분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1% 나눔 운동과 아름다운 가게사업을 펼치는 아름다운 재단이 기부문화의 확산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종착은 역시 일반 시민들이 동참하는 기부의 생활화다. 2002년 아름다운 재단이 실시한 전국조사에 따르면 연간 기부총액의 개인 평균은 5만1천700원이지만 국민의 52%가 전혀 기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고액이 아니면 기부라는 말에 종종 어색해 한다는 인식부족을 방증하고 있다.

수백억원을 자선 단체에 쾌척하는 사업가와 평생을 피땀 흘려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하는 할머니도 있지만, 대부분 보통사람들은 기부를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을 담아서 내는 돈이라도 그것이 몇 푼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기부금이라고 여기지를 않고 있다. 미국은 시민 10명 중 9명이 지난 2년 동안 기부 경험을 갖고 있고 자신의 기부활동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공헌한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극히 일부기는 하나 부를 축적한 시민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흔쾌히 재산을 환원하는 기부풍토가 서서히 자리잡아 가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달 수원에서는 문구점을 경영하는 이홍종씨가 100억원대의 사재를 털어 불우청소년을 돕는 복지재단을 설립해 세간에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될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역할과 기여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형성될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많은 사람이 동참하는 촉매제 역할을 기대함은 물론이다.

결국 우리사회의 결정적 변화는 기부문화의 폭넓은 정착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기부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아이들 학교 행사나 음악회, 또는 자선 단체 모금을 위한 이벤트 등에서 남하고 나누는 기쁨과 보람이 항상 접하는 일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인철(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