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 영화관에서도 2년6개월 전과 지난 봄 두 차례나 상영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1935년 작곡되어 수백명을 자살로 이끌었던 노래 ‘Gloomy Sunday’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자막이 나온다. ‘우울한 일요일’은 헝가리의 가난한 젊은 음악가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작곡한 노래다.

영화에서 젊은 음악가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로 이 노래를 연주한 후 권총으로 자살한다. 현실 세계에서도 애절한 멜로디의 ‘우울한 일요일’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헝가리 경찰은 국내 자살자가 갑자기 20여명으로 늘어나자 이 노래의 연주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우울한 일요일’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같이 자살에도 유행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자살의 유행론’을 뒷받침하듯이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몇 년전부터 인터넷에서 자살 사이트를 접속한 후 자살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더니만 요즘 들어서는 생활고를 비관한 사람들에서부터 재벌그룹 회장에 이르기까지 자살이 유행병처럼 도지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정몽헌 회장 자살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지만 그 역시 가족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한 '우울한 일요일'을 보낸 뒤 월요일 새벽 집무실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지난달 17일 한 어머니가 '죽기 싫다'고 외치는 자녀 3명을 고층아파트에서 내던지고 자신도 투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자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근래에 벌어진 자살 사건들은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자살의 이유나 유형도 생활고를 비관한 한국 최고대학 출신 시간강사의 자살, 구타를 비관한 이등병의 자살, 장군의 자살, 차 시중 논란을 벌이던 현직 교장의 자살, 카드 빚 5천만원을 고민하던 젊은이의 자살, 성형수술 결과에 비관한 20대 여성들의 자살, 성적이 나쁘다고 벌이는 10대들의 자살, 부모의 학대에 따른 어린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자살문제를 개인적인 미숙함이나 어리석음으로 돌리기보다 사회문제로 취급하여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지만, 최근의 연속적인 자살사건들은 이미 예견되어 왔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15.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이미 5위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통계청 조사(2001년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19명이 자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살문제는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당면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흔히 비겁과 패배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점점 각박해지는 경쟁사회에 적응하기를 실패한 인생의 낙오자들이 자살을 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과 무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왜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는지 그 이유라도 한번쯤 따져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중에서 가장 탁월한 고전으로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쓴 '자살론'을 들 수 있다. 뒤르켐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로 먼저 물질문명이 발달한 산업사회의 이면에 무규범(Anomie)상태 역시 증가하는 사실을 근거로 든다.

즉 농촌사회와 같은 공동체에서 쉽게 발견되는 끈끈한 인간적인 정과 규범이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개인은 도시적인 익명의 존재로 전락하고 인간관계 역시 이해관계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무규범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쯤되면 이제 정부가 나서 자살예방을 위한 시스템 마련에 나서야 한다. 각종 질환과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예방에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면서도 국민들의 주요 사망원인인 자살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사회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내 가족이 풍족하게 살면 그것 뿐이라는 몰염치가 판을 치는 세상의 모습,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에게 덕을 베풀기보다 그들을 짓밟고 일어서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 상황들을 몰아내는 것도 급선무다. 자살을 뒤바꾸면 '살자'다.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려는 이들은 '살자'로 뒤바꿔 고귀한 선택을 하자./이준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