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제대로 걸려들었다. 'SK 비자금 스캔들'의 수렁에 단단히 발목이 잡혔다. 도덕성을 집권 기반으로 했던 대통령의 측근이 11억원을 당겨 썼고 이를 미리 보고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집권이 유력했던 제1야당 한나라당이 100억원을 꿀꺽 삼켰고 대통령이 될 뻔한 이회창 전 총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옥갈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권 인사 모두가 불법정치자금으로 부터 자유로운 정치인과 정당은 없다고 자백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검은 돈'에 대해 정치권은 공동정범의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범죄 피의자들이 범죄의 실체를 밝히는 수단과 범위 뿐 아니라 처벌수위에 이르기 까지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고 있으니 말이다. 피의자들이 엄정한 법집행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국민들로서는 그들의 철면(鐵面)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정치권은 이제 부터라도 검찰수사에 영향을 미칠 일체의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먼저 노 대통령부터 말을 아낄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지난 2일 “(SK 자금 뿐 아니라) 대선자금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다. 일단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는 대한민국 검찰의 고유 권한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커도 간섭해서는 안되는 성역이다.
간섭이라고 인식되는 순간 검찰의 공정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검찰이 수사 범위를 5대 재벌 등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단서가 있는 모든 기업으로 확대할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대통령의 사전 발언으로 검찰의 의지가 아닌 정권의 의지로 곡해되는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일반 정치자금이나 보험성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에 대해 사면하고 넘어가자고 제안할 용의가 있다”는 말 또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범죄는 국정운영 주체인 정치인을 타락시키는 국기문란 범죄로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는 중대 범죄다. 준 쪽이나 받은 쪽이나 쌍방을 처벌하지 않고는 근절이 힘들다. 범죄의 양형(量刑)은 그 양상에 따라 사법부가 결정할 문제고, 형의 공평성과 정상참작은 피해자인 국민이 판단할 문제다. 국민들은 불법 자금 수수 규모의 다과(多寡)와 양상의 경중(輕重)에 상관없이 정치권을 지배해온 검은 돈의 실체를 발본하기를 원하고 있다. 대통령이 진정으로 혁명 수준의 정치개혁을 원한다면 정치적 오해를 초래할 발언은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내서는 안된다.
한나라당 역시 검찰에 대해 말조심해야 한다. 수사 형평성을 시비하며 검찰의 수사를 원천 부정하는 태도가 국민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은 죄를 생각하면 형평성을 논할 처지가 아니다. 당 대표, 사무총장, 대통령 후보, 소장파 의원들이 잇따라 대국민 사과를 해도 여론이 호전되지 않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 100억원 수수를 부인하고 야당탄압이라고 강변했던 구태의연한 최초의 대응이 가져온 자기부정의 결과를 참담한 심정으로 반성해야 한다. 특검 요구는 국민이 동의할 때야 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국민은 정치권에 '공멸을 통한 신생'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은 부패정치에 대한 성전(聖戰)을 벌이고 있고 검찰은 국민의 염원을 대리하고 있을 뿐이다.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전례없는 신뢰는 이 때문이다. 지금 검찰은 국민신뢰라는 사생(死生)의 낭떠러지에 서있다.
신뢰를 잃으면 검찰도 죽는다. 그만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엄정하다. 정치권은 살아남기 위한 정략을 포기하고, 아름답고 비장한 공멸을 의논해야 할 때다. 그러니 그 입들 좀 다물라. /윤인수(논설위원)
정치권은 그 입 다물라
입력 2003-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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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0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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