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효종∼숙종 때의 선비 홍만종(洪萬宗)의 평론·속담집인 '순오지(旬五志)'를 보면 '포호함포(咆虎陷浦)'라는 말이 나온다. '개펄에 빠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 시끄럽기만 하고 되는 일, 성취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지금 이 나라가 꼭 그런 형국, 형세가 아닌가 싶다. 아니, 한 마리의 호랑이도 아닌 숱한 호랑이 떼가 늪에 빠져 온통 뒤죽박죽 엎치락뒤치락 으르렁거리는 꼴이다.
 
대외·대내적인 숱한 난제들이 처녑(천엽)에 똥 쌓이듯이 쌓여 있고 떼어내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홍수 지난 뒤의 시냇가 버드나무 가지에 너덜너덜 걸려 있는 비닐 조각 같거늘 그래도 '나는 몰라라' 어느 지도자 있어 쾌도(快刀) 한 자루 꼬나들고 나서는 사람 없고 뾰족한 대책 하나 들고 나오는 사람 없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o homoni lupus)'처럼 싸우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으로 난마처럼 마구 뒤얽힌 이 사회상, 이 나라꼴을 언제까지 방치하고 있을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즐겨 쓰던 그리스어에 '아포리아(aporia)'라는 말이 있다. 뚫고 나갈 통로와 수단이 없다는 뜻이다. 사유(思惟)가 궁하고 말라 도무지 해법이 없는 난관,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논리적인 난점이 아포리아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아포리아 사회, 이 국가가 다름 아닌 아포리아 수렁이다. 다시 말해 질서와 통제력을 상실한 무정부 상태, 선장도 없이 항해하는 무(無) 대통령 국가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무정부, 무대통령 국가의 '비근(卑近)'한 예가 아니라 '비원(卑遠)'한 예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인 세르비아다. 지금 그 나라는 1년 3개월째 정부 부재, 대통령 부재의 무정부, 무대통령 사태에 빠져 있다. 밀로셰비치 정권 붕괴 3년이 지났는데도 극성스런 정쟁과 경제 혼란, 국민의 정치 무관심에 빠진 세르비아는 작년 9월 대통령 선거를 치렀지만 투표율 50%에 못 미쳐 무효가 됐고 석달 뒤의 같은 선거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래서 지난 11월 16일 세르비아 민주연합의 미추노비치 등 6명이 입후보한 채 제3차 대통령 선거를 치렀지만 또다시 투표율 50%를 밑돌아 무효가 돼버렸다. 게다가 지난 11월 13일 의회마저 해산해 그야말로 No 정부, No 대통령에다 No 의회라는 사상 유례없는 나라꼴로 전락한 것이다.
 
지난 11월 22일 시위대가 대통령이 연설 중인 국회 의사당에 난입하는 등 무정부 상태의 혼란 끝에 드디어 이튿날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의 사임 사태를 초래한 그루지야의 무대통령 사태는 어떤가. 그 나라 역시 아포리아 사회, 아포리아 국가다. 그런데 그들 나라와 우리가 지금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13억 중국인은 유인 인공위성을 쏴 올리는 등 집어삼킬 듯 바짝 추격해오고 1인당 GNP 3만몇천달러의 일본은 여전히 '날 잡을 테면 잡아 보라'는 듯이 멀리 산모퉁이를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고 있는가 하면 북한의 핵 위협 또한 아직은 여전하거늘 우리는 우리끼리 허리 잘린 이 한반도 땅, 뾰족한 달팽이 뿔 위에서 무시무시하도록 싸우는 와각지쟁(蝸角之爭)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늪에 빠진 호랑이 떼를 건져 올리고 달팽이 뿔 위에 달라붙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다투는 숱한 집단이기주의자들을 끌어내려 해산시킬 단 한 사람의 똑똑 소리 나는 지도자가 절실하다. 명군(名君)으로 꼽히는 한(韓)나라 소후(昭侯)의 말처럼 '명군이란 함부로 벌쭉벌쭉 웃지도 않고 함부로 상을 찡그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입을 한 일(一)자로 굳게 닫아 건 채 오직 일등 국가 창출의 길만을 매진할 지도자, 냉철하고도 냉엄하고 영민한 지도자는 정녕 이 땅에 없는가. /吳東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