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를 보낸다. 태풍 매미, 대구 지하철 참사, 500억원이 넘는 불법 대선자금, 로또 광풍,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체포 등 숱한 사건들로 점철됐던 한 해가 말없이 흘러간다. 심심하면 터져나온 대통령직 내놓겠다는 가슴답답한 충격.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현실과 정치·사회적 불안속에서 민초(民草)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좌불안석(坐不安席)이지만 그래도 계미년(癸未年)의 한 해는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이는 비단 누구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요,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삶의 인과응보가 아닐까?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도 있듯이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과 충격들은 과거의 생각이나 행위가 씨가 되고 입이 되어 그에 걸맞은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재신임을 묻겠다던 허무맹랑하기까지 했던 국민과의 약속은 없었던 일(?)로 끝나버리게 돼 한 편의 코미디로 지나버렸다. 노 대통령측의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던 약속도 엊그제 검찰의 수사결과에서 60억원이 넘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또다시 논란거리다. '눈앞이 캄캄했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진정 눈앞이 캄캄한 것은 국민들이다. 올해 대학교수들이 꼽은 사자성어인 우왕좌왕(右往左往) 그대로다. 좌충우돌, 지리멸렬하면서 지난 1년을 보낸 것같아 답답하기 그지없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는 '천망회회소이부실(天網恢恢疏而不失)'이란 말이 나온다. '죄를 짓고 인간사회의 그물은 빠져나올 수 있어도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정치지도자나 국민 모두가 되새겨야 한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태도는 또다른 불신을 낳게 마련이다. 새해부터 우리는 그동안 씻어내지 못한 불신과 부정의 앙금을 모두 털어내고 투명한 사회를 건설하는 결연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투명한 사회는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 원리·원칙이 존중되는 사회다. 결국 투명한 사회는 밝고 맑은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투명한 사회는 공직자는 물론 모든 사회 구성원이 투명한 인간이 돼야 이룩되는 사회다. 우리는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책임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은 물론 사회 전체에 어떤 불행을 가져다 주는지 똑똑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사회에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세밑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다. 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는 짙어만 가고 정치권의 볼썽사나운 정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대선자금을 둘러싼 공방, 꼬리를 문 대통령 측근들의 부패, 차떼기로 수백억원의 대선자금을 거두어간 한나라당, 도덕 불감증에 사회기강은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졌다. 민심은 등을 돌렸고 국민들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새해 벽두에 걸었던 희망과 기대는 세월만 허송한 채 물거품이 돼버렸다. 저무는 한해를 되돌아 보면 왠지 속은 것 같아 허탈하기만 하고 국민들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제 또다시 뭔가 달라질 새해를 기다린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 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희망찬 2004년 갑신년 새해에는 더 이상 국민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 이제 제발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은 그만 하자. 성경 야고보서에는 '혀는 악의 불씨'라 가르쳤다. 혀를 잘못 놀려 파생되는 문제는 실로 엄청나기에 말의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들이 곰곰 되씹어야 할 대목이다.

박두진 시인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라고 노래했다. 새해는 정말 모든 분야에서 투명한 세상이 돼 희망찬 미래가 보이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이준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