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등장한지 1년이 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개시와 더불어 시작된 개혁이다. 앞서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도 개혁은 정권 차원의 캐치프레이즈였으나 그들이 깔고 앉은 기득권과 원죄의 무게로 인해 좌절되거나 왜곡됐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개혁은 이와 달랐다.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정치적 빈곤으로 인해 오히려 개혁 주체로서의 위상이 선명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개혁을 통해 국가 작동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국민적 기대를 모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민은 개혁을 통해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고 구악과 구태를 청산하는 국가개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개혁의 주체이자 총아(寵兒)였던 노 대통령의 요즘 처지가 딱하다. 감옥행의 동반자로 호명되고 탄핵 대상으로 거론중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전총재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검찰은 저에 대한 수사를 하루속히 마무리짓고 국법에 따라 저를 사법처리하기 바란다”면서 노 대통령에게는 “대의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이 먼저 불법대선자금의 원죄를 지고 감옥에 갈테니 대통령도 따라오라고 채근하는 형국이다. 그 태도의 결연함과 당당함이 앞선 두차례의 사과 기자회견과 때와는 천양지차이다. 한나라당은 이에 보조를 맞춘 듯 멈칫했던 대통령 탄핵안 발의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논란은 있지만 노 대통령은 개혁의 주체로, 또 한나라당과 이 전총재는 개혁의 대상이자 구태의 장본인으로 여론에 비쳐졌던 게 엊그제다.
지금 국민은 개혁이 희극으로 변질되는 비극을 지켜봐야 하는 딱한 상황에 저절로 졸도할 지경이다. 더욱 딱한 일은 노 대통령이 이런 기막힌 상황을 자초한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노 대통령은 개혁 주체로서 지녀야 할 도덕성과 진정성에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개혁주도권을 쥐어잡는 계기가 됐던 대선자금 수사정국의 시초 부터 단추를 잘못 채웠다. 그 때 자신의 불법자금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기업들에게 사면을 전제로 양심고백을 요청했어야 했다. 그리고 검찰이 이를 확인한뒤 대통령 스스로는 재신임을 요청하고 야당으로 하여금 정당해산 차원의 각성을 있도록 유도했어야 순서에 맞았다.
그런데 덜컥 재신임을 내걸고 모든 걸 검찰수사에 미뤄버렸다. 최초의 고백이 무산됨에 따라 속속 밝혀지는 측근비리에 개혁을 주장하는 대통령의 도덕적 기반이 야금야금 허물어졌다. 그리고 이를 변명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리무진과 티코' '10분의 1' 등 비도덕적인 '도덕성 차별론'을 주장하는 부적절한 수사(修辭)로 개혁의 엄숙성을 스스로 깨트렸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직후 강화된 야당의 10분의 1 공세에 계산법이 다르다고 딴청을 부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법자금을 깔고 앉았던 열린우리당 또한 검찰의 수사결과에 대해 '전체 정치권의 잘못' 속에 '자신의 잘못'을 끼워 파는데 망설임이 없다. 개혁은 이런식으로 헝클어 놓고, 개혁기반을 새로 구축해야겠다며 죽어가는 야당을 살려 전면전을 펼치는 형국이니 국민에게는 이 또한 희극이자 비극이다.
노무현 정권의 헛점투성이 개혁은 국민과 야당에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 더욱 걱정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금이 가고 있고, 야당인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진정한 보수정당으로의 갱생을 포기하는 빌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모두 불안한 조짐이자 현상이다. 국민의 개혁욕구가 정략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개혁의 객체와 대상이 진정한 개혁주체인 국민을 핍박하는 모순적인 희비극을 타파하기 위해 대통령의 개혁 청사진은 처음 부터 다시 그려져야 한다. 그 청사진의 개념은 창조적 파괴를 통한 미래지향적 화합의 잉태가 돼야 한다. 노 대통령은 지금 사방의 적들과 난투를 벌일 게 아니라 개혁 대세 회생 방안을 숙고해야 할 때다. /尹寅壽〈논설위원〉
개혁이 희극으로 변질되는 비극
입력 200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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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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