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는 아이디어와 베팅으로 부의 왕국을 이어가는 미국 부동산 재벌이다. '세상을 뒤통수치는 재미'로 사는 듯한 그가 또 한 건 했다. '넌 해고야(You're Fired)'라는 구호에 대해 특허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넌 해고야'는 그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NBC의 The Apprentice)에서 히트한 유행어다. 시청률 저조에 고민하던 NBC가 혹시나 하고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의외로 인기가 치솟아 벌써 2기 모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연봉 25만달러짜리 트럼프그룹 자회사 CEO 자리를 걸고 대본도 없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지원자들은 과제수행 능력과 인터뷰를 통해 1주일에 1명씩 잘려 나간다. 이들은 트럼프로부터 'You're Fired'라는 말을 듣는 순간 보따리를 싸야 한다. 명목은 인재선발이지만, 실제로는 '누가 짤리나' 엿보고 즐기는 '해고 리얼리티 쇼'인 셈이다. 물 건너 얘기일까.
 
겹쳐서 떠오르는 장면이 둘 있다. 우선, 오래전에 본 영화 '백 투더 퓨처'의 신 하나. 몇 편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마티(마이클 제이 폭스)가 늙어서 해고통지를 받는 광경이다. 팩시밀리를 비롯해 집안의 모든 통신기기가 큼지막하게 쓰인 'You're Fired'를 사방에서 토해 낸다. '넌 짤렸어' '넌 짤렸어' '넌 짤렸어'…. 감독은 그 때 이미 트럼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지난달말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 노사 분규를 겪고 있던 한 카드사가 농성 중인 노조원들에게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회사로서는 귀하에게 2004년 2월28일자로 정리해고 통보를 하게됨을…'. 우리도 억장 무너지는 통보를 이렇게 간단하게 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이 회사 역시 외국자본이 모회사를 인수하면서 진통을 겪던 뒤끝에 벌어진 일이다.
 
'You're Fired'. 참 섬뜩한 구호다. 춘분이 지났어도 새삼 오싹 한기가 돈다. 트럼프는 이 구호를 특허 내서 게임 놀이 의류 등에 활용하겠다지만, 우리네 정서로는 발끈 부아부터 치민다. 그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인가?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유연성 확보가 한국경제의 살 길'이라고 외치는 측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왕 '미국 표준'이 '세계 표준'이 된 마당에 대세를 거스를 수야 없지 않느냐는 현실론자들도 상황을 냉정하게 보자고 주장한다. 국제경쟁력이 초미의 화두인 이상 대량해고와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트럼프의 '해고 게임'도 달리 해석된다. 미국 TV를 쭉 지켜본 어떤 관찰자는 트럼프의 예리한 판단력에 감탄한다. 저 무슨 '쌩쑈'냐 싶다가도 함량미달 지원자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트럼프를 보고 있노라면, 미국 경제의 저력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고의 경쟁력을 위해 가차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저 풍토를, 몸서리쳐지기는 하지만 우리도 배울 때가 됐지 않았냐는 얘기다.

그러나, 그게 과연 정답일까. 이 땅의 직장인들은 두렵다. 정년이 오륙도, 사오정도 모자라서 삼팔선 아래로 밀려내려온 이 마당에 무차별 '넌 해고야' 마저 상륙 직전인 이 현실 앞에 차라리 질끈 눈을 감고 싶어질 듯하다. 400만 신용불량자와 이태백들은 아예 할 말이 없을 터이다. 정녕 그 길밖에는 없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다. '미국물'을 직수입해다 쓴 지 60년 가까워오지만, 이번 것만은 제발 배워오지 말자. 어떻게든 함께 사는 길을 찾아보자. 이렇게 말하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몰매를 맞을까. 그래도 할 수 없다. '넌 해고야'라는 구호를 해고해 버리고 싶다는 게 대한민국 평범한 직장인의 바람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트럼프는 'You're Fired!'를 외치면서 속이 쓰릴까, 쾌감을 맛볼까. 그게 궁금하다. /양훈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