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섯 개의 모자가 있다. 색깔이 다 다르다. 각각의 색깔은 고유한 기능을 나타낸다. 진행자가 요청한다. 빨간 모자를 쓰십시오. 참석자들은 모두 현안에 대한 느낌이나 직관에 생각의 초점을 맞춘다. 이번엔 초록 모자를 쓰십시다. 참석자들은 이제 현안을 풀어갈 창의적 상상력에 집중한다. 이런 식으로 노란 모자는 이익을, 검은 모자는 문제점을 검토하는 기능을 맡는다. 하얀색은 정보를 얻는 방법, 파란색은 절차와 진행방식을 환기한다. 참석자들은 여섯 개의 모자를 번갈아 쓰면서 최상의 해법을 찾아간다.
 
에드워드 드 보노가 창안했다는 '여섯 색깔의 생각 모자 기법'은 일견 유치해 보이지만 효과는 상당히 높은 것으로 증명됐다. IBM, NTT, 듀폰, 프루덴셜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이 기법을 도입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이미 꽤 널리 소개돼 있다. 실제로 점잖은 세계적 기업의 중역들이 테이블에 모자를 한무더기씩 쌓아놓고 허둥지둥 갈아 쓰는지, 아니면 말로 대신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루하고 산만해지기 쉬운 회의를 산뜻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찾는 분위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모자 기법'을 한국 정치에 적용해 보자. 총선이 끝난 지금 각 당은 어떤 모자를 쓸 때인가. 모두가 한결같이 다짐하고 있는 '상생의 정치'가 입에 발린 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색깔이 필요한가. 지금까지 그들은 어떤 모자를 고집했기에 이 상황에 이르렀을까.
 
지난 대선 이후 야당은 주로 '검은 모자'에 집착했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뒷전이고, 스스로 '부적격자'라고 규정한 대통령의 실언 실수 실책만 눈을 뒤집고 찾았다. 때때로 한 건 올리면 뒤돌아서서 '노란 모자'를 걸치고 득실을 셈했다. 특히 민주당은 분당 이후 '빨간 모자'와 '검은 모자'를 번갈아 쓰면서 탄핵 정국을 자초했다. 국민이 보기에 야당들은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초록 모자'를 쓴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통령과 여당이 '초록 모자'를 썼던가. 글쎄, 별로 기억이 없다. 역시 '빨간 모자'를 쓰고 직감적으로 '코드'에 맞는 인물, 정책에 급급하지 않았던가. 국민을 창의적으로 설득해 내는 '초록 모자'는 그만두고, 정상적인 국정의 절차와 진행방식을 준수하는 '파란 모자'만이라도 제대로 쓰고 있었던들 상황은 그리 어려워지지 않았을 지 모른다. 오만한 '노풍(老風) 발언' 역시 '파란 모자' 대신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래도 '과반수 여당'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검은 모자'에 병적으로 집착한 야당의 '삽질' 덕분이었다.
 
그나마, '초록의 신선함'을 보여준 것은 민주노동당이다. 여러 시민단체와 언론이 채점한 각당 정책평가에서 민주노동당이 거의 1등을 차지한 것이 그 증거다. 민주노동당은 '검은 색(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경고)' 하나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과거의 진보정당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초록 모자'는 앞으로 더욱 바빠져야 한다. 상당수의 국민은 아직도 '빨간 모자'를 쓰고 민주노동당을 바라보고 있다. 아차 하는 순간 돌팔매가 날아들 것이다. '계급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사회전체의 이익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걸 어떻게 국민들에게 납득시킬 것인가, 계속 '초록 모자'를 쓰고 깊이깊이 궁리해 봐야 한다.
 
민주노동당 만이 아니다. 열린우리당도,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지금은 '초록 모자'를 쓸 때다. 과거의 타성과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드 보노 박사가 지적하듯이, 최상의 결과는 여섯 모자를 적절하게 활용할 때 얻어진다. 하지만, 당분간은 모두 '초록 모자'를 써야 한다. 마침 계절도 싱그러운 신록이다. /양훈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