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섬겨야 할 윤리적 동일체로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충과 효를 중시했던 유교사상이 지배한 조선시대에 스승을 자신의 군주나 부모와 같이 비유한 말이다. 이 외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보여지듯 과거부터 사제간의 예를 중시하였고 그만큼 스승의 위치나 권위는 감히 도전이 불가능한 성역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군림하는 임금이 사라진 현대에도 사부(師父)일체의 윤리관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사부일체의 윤리관은 무색해지고 있다. 지난달 8일 평택시 비전동 16층아파트에서 평택 H여중 양호교사 이모(여·39)씨가 50여m 아래 화단으로 떨어져 숨진 사건이 있었다. 숨진 이교사의 수첩에서 '내가 모든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글이 발견되었고 남편 이모(45)씨는 경찰에서 '아내가 최근 학부모로부터 여러 차례 항의전화를 받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학부모가 교장을 감금폭행한 사건, 담임교사에게 꾸중을 들은 고교 신입생이 앙심을 품고 수업 중이던 담임교사를 폭행한 사건 등 교권붕괴의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모든 권위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대적 추세를 감안한다 해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이다. 이제는 이같은 현실을 두고 패륜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라고 지적하는 이도 없다.
 
그렇다고 교권실추의 원인에서 교사들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교사란 학교라는 사회안에서 학생들에게 제2의 부모로서 삶의 도리를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 아직 완숙하지 못한 어린마음들을 올곧고 참되게 인도해야 하는, 세상의 침범이 거부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추구하는 참된 교사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업중인 학생을 불러내 성추행을 하는 교사, 돈이 없어졌다며 남편을 사복경찰관으로 꾸며 교실에서 자기 반 어린 학생들에게 지문을 찍게 한 교사 등 교사로서의 자질조차 의심스런 교사들이 생겨남에 따라 스스로 교권을 깎아내리는 사회가 돼 버렸다.
 
백년대계라 불리는 교육, 무엇보다 때묻지 않고 순수해야할 그 성역의 수호자인 교사의 역할이 어찌 이리 볼품 없어졌는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다변화된 사회에서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근본원인을 찾아보면 첫째 우리 사회 전반의 법 경시 풍조, 둘째 교원들의 책임의식의 결여, 셋째 합리적 토론문화의 부재, 넷째 무분별한 집단행동, 다섯째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 등을 들 수가 있다. 더욱이 선생과 학생의 세대적 차이가 증폭되는 과정에서 교단에서 빚어지는 교사들간의 반목은 스승의 면목을 스스로 허무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학교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추스러 짓밟힌 교권을 되찾을 방법은 과연 없는가. 우선 교육자는 스스로 권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현실 교육여건이 선생들에게 때로는 냉혹하고 지속적으로 평범한 사회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초연해야 한다. 물론 이런 주문에 일부 교사들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한 시대 착오적 탁상공론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이미 여러단체를 만들고 이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집단행동도 불사하는 스승상이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 학생들은 스승들의 부도덕하고 집단이기적인 행동을 보고 느끼며 또한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앞으로 평생 알고 간직할 스승의 모습이 이렇다면 비극이 아닐수 없다.
 
3일 뒤면 예외없이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다. 스승은 인생의 등불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 이 시대의 등불이 희미하다.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한다. 지식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있되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부재한다는 의미이다. 교육이란 형식이 아니다. 스승은 아이들 가슴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주목할 때이다./윤인철〈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