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이후의 이슈는 파병과 경제다. 먼저, 이라크 파병문제는 주한미군 전환배치라는 돌발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그럭저럭 사회적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내에서도 재검토 의견이 우세해졌다. 포로학대가 폭로되면서 세계의 여론이 확실히 돌아섰고, 국내 여론도 70% 이상이 반대 내지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정부와 일부 보수층은 여전히 '국제 신의'를 내세워 파병 강행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의리? 좋은 얘기다. 한 번 한 약속은 해골 두쪽 나도 지키는 게 떳떳하다. 하지만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에서 달랑 '의리론' 하나만을 근거로 약속이행을 고집하는 건 순진하거나, 멍청하거나, 아니면 둘 다 이거나 라는 국제적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파병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럴싸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터져나온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같은 게 그렇다. 그보다 더 심각한 뭐가 있는가? 그러나 파병을 하려면 그 뭔가가 뭔지를 정직하게 털어놓고 국민들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지금 이 마당에 못 밝힐 게 뭐 있나? 혈맹이자 미래동맹인 미국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쳤을 때 우리가 당할 불이익이 다소 걱정되긴 하지만, 그럴수록 정당한 절차가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전 제기됐던 이분법적 질문 하나가 생각난다. 총선 직후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상대로 던져졌던 질문이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어느 쪽과의 관계를 더 중시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것이다. 얼핏, 국가의 장래와 관련된 중요한 선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이 질문은 그러나 사실 우문(愚問)에 가깝다.
 
사안 사안에 따라 교류하고 협력해야 할 상대가 다른 게 국제사회다. 당연히 그때그때 우리에게 더 필요한 쪽과 손을 잡아야 한다. 굳이 나는 니네보다 쟤네가 더 좋다고 미리 못박아서 특정국가의 속을 긁어놓는 짓은 어리석다. 이쪽 중시면 보수, 저쪽 선호면 진보 하는 식으로 편가르기를 할 요량이 아니라면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왜 굳이 까발려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극단화시킨 양자택일론은 위험하다. 그런데, 최근 경제 분야에서는 이런 근본주의적 이분법이 더 극성이다. 시장이냐 정부냐, 성장이냐 분배냐···. 수구층이 몰락하고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한데 자극받아서일까? 숱한 논객들이 나서서, 마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친다는듯 다그치고 있다.
 
그러나, 한번 따져보자. 정부없이 시장만으로 작동하는 경제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시장 없는 정부만의 시스템은 10여년 전에 관 속에 들어가지 않았나? 결국 문제는 시장의 결함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이지, 시장이냐 반시장냐가 아니다. 아담 스미스도 시장의 허점을 알았고, 칼 마르크스도 시장의 힘을 인정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양 극단을 제외하면, 시장을 전면부인하는 좌파도, 정부의 역할을 완전 무시하는 우파도 없다.
 
성장이냐 분배냐도 마찬가지다. 성장 없는 분배가 있을 수 있는가? 분배도 되지 않는 성장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 이 역시,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고루 나눌 것이며, 성장을 지속(가속)시킬 수 있는 분배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분배를 언급하면 성장은 아예 하지 말자는 주장으로 몰아붙이거나, 성장을 얘기하면 분배를 전혀 도외시하는 견해로 치부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헛된 논쟁만을 부풀린다.
 
시대착오적 이분법은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고, 구성원들의 시야를 가린다. 한국사회가 지금 유사 이념논쟁에 시간을 허비할만큼 한가한가? 탄핵 이후 파병과 경제 말고도 해결해야할 시급한 과제가 산적해 있지 않은가? 사이비 이분법은 화합과 상생 대신 분열과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의도 불순한 논쟁을 경계해야 한다. /양훈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