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재·보선에서 열린 우리당이 참패를 면치 못했다. 4·15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맛본 우리당이 불과 두달이 채 안된 상황에서 직면한 결과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이런저런 분석이 분분하다. 의외의 사태이니 당연하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히고 일각에서는 전대를 통한 당쇄신론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차떼기 원죄에서 홀가분해진 듯 만면에 미소다. 민주당은 회생을 반기는 입장이다. 한순간 엇갈린 명암에 정치권의 희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형국이다.
하지만 여당이 침통하든 야당이 기뻐 흥분하든, 국민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선거는 정치권 그들만의 리그일 뿐 이미 국민들 생활에서는 멀어진 특히 서민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일상이 된지 오래기 때문이다. 광역 단체장 4곳과 19곳의 기초단체장을 포함해 기초의원 등 전국 114개 지역에서 실시된 이번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28.5%에 그쳤다. 중앙선관위가 예전보다 투표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투표 마감 시간을 2시간 연장해 오후 8시로 조정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보선의 의미가 주는 교훈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전대미문의 정치자금 차떼기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맞물려 열린우리당에 1당의 힘을 몰아준 전국의 유권자가 총선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시기에 이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릴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판결 이후 직무에 복귀하며 국민 대통합의 상생정치를 약속했다. 또한 한동안 본의 아니게 은둔에 들어갔다가 새롭게 등장한 조심스러움으로 통치 스타일이 크게 변화됐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발언이 또다시 사회의 파장을 일으켰고 조기 개각에 집착하는 바람에 통치스타일을 구기기도 했다. 야당이 반발하고 여당 일각이 문제삼은 김혁규 총리지명 고집은 대통령이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당정은 파열음을 내며 정책혼선으로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일부정책은 정책 조율 과정이 걸러지기도 전에 마구 발표되는 바람에 일관성을 상실하며 결국 국민을 걱정시켰다. 총선 공약사항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문제를 놓고 당정과 지지층 사이를 오락가락 내분을 드러냈고 청와대 당선자 자축행사는 서민의 고통을 외면한 오만한 처사라는 야당의 공세에 시달렸다. 보선에 쏟아부은 중앙당력은 올인의 오명으로 악재가 됐다. 한마디로 총선 51일만의 국정운영이 집권 여당 답지 못했다는 실망인 것이다.
이제 막 개원한 17대 국회가 순탄치 않을 것이란 진단이 나오고 있다. 별로 틀릴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상생과 서민경제의 회생에는 거리가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보선과 국회개원을 앞두고 드러낸 여·야의 공세적 협상안들은 국무총리 인선, 국회 상임위원장 배정 등 소위 고도의 상생력이 요구되는 부문에서 한계를 보여준 바 있다. 오히려 구태정치를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 게 사실이다.
정치인들은 어떤 결과에 대해 불리한 입장이 되면 항상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수용한다고 말한다. 수없이 되풀이해 들어온 상생을 꺼내들고 또다시 상황을 순간적으로 모면해 보려한다. 그러나 국민은 정치인의 상생과 민생안정이라는 화두를 믿지 못한다. 국민의 눈에 비친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개선과 진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치권이 겸허와 상생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반문해 봐야 할 시점이다. 선거에 지면 겸허해지고 이기면 오만해져도 괜찮은지 말이다.
여·야는 툭하면 오만이다 발목잡기다 하며 다투지만 국민은 정치권이 자숙하는 자세로 국가안정과 서민경제에 활로를 틔워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보선에서 국민은 말과 행동이 다른 정당을 가차없이 심판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여야 정당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윤인철〈논설위원〉
말과 행동을 의심한다
입력 200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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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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