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자 교육이 필요하고 ‘왜 한자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국어 교육이 필요하고 ‘왜 국어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우문(愚問)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한자 교육을 외면, 한자 문맹 국가를 만들어 가는 까닭은 한자는 우리 문자가 아니라는 오해 때문이다.
 
‘漢字’는 물론 중국 산(産) 글자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는 장장 2천년 전 이 땅에 영주권을 갖고 귀화(歸化)한 글자로 이미 ‘漢字’가 아닌 ‘韓字’가 돼버렸고 오직 우리만이 쓰고 있는 글자라는 것을 왜들 모른다는 것인가. 일본으로 건너간 한자도 마찬가지다. 중국 글자가 아닌 일본 글자 ‘日字’가 된 것이다. 예컨대 ‘國語’라는 말만 해도 중국에선 ‘꿔위’ 일본은 ‘고쿠고’라 읽고 ‘學校’도 중국에선 ‘수에샤오’ 일본은 '갓코'로 읽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 '국어'와 '학교'로 읽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國語'와 '學校'를 중국 글자라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일본에 귀화한 일본 한자가 중국 것이니까 모두 내다버리고 일본 고유문자인 가나(假名)만 쓰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일본어는 존재할 수도 없다.
 
한자가 중국서 온 글자니까 버리자는 것은 마치 영어가 로마자니까 영어를 버리자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영어가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왔으니까 영어를 몽땅 내다버리자는 논리나 다를 바 없다. 영어뿐이 아니라 같은 로마자를 쓰는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자를 버리는 식이라면 영·독·불·이·스페인어도 버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각각 엄존하는 까닭은 한·중·일의 한자처럼 알파벳 글자는 같지만 각각 발음이 다르고 뜻이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언어로 귀착, 굳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어의 ‘愛人’은 부인, ‘丈夫(장부)’는 남편을 뜻하고 ‘老婆(노파)’는 마누라, ‘約束(약속)’은 단속을 의미한다. 일본어 역시 ‘文句’는 불평, ‘師走’는 뜀박질하는 스승이 아닌 ‘섣달’이고 ‘靑大將’은 푸른 옷의 장수가 아니라 구렁이다. 중국 한자는 글자 모양도 달라졌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서로 통할 수 있는 게 한·중·일의 한자다.
 
우리말의 70%가 넘는 한자어를 한글로만 적는 건 한자의 3대 요소인 모양(形), 소리(音), 뜻(義) 중에서 글자 모양과 발음만 취하고 ‘뜻’은 버리는 것이고 결국 국어를 버리는 짓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뜻이 없는 언어, 뜻을 모르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우리 한자어를 발음만 한글로 적으면 뜻을 몰라 뜻이 없어진 언어, 보자기에 싸인 물건처럼 돼버린다. 문장 속에 들어가 앞뒤로 수식어가 받쳐줘야만 뜻이 노출되는 어휘라는 얘기다. 센텐스가 아닌 어휘만으로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언어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자의 보완이 필요하다. 더욱 한심한 건 바꿀 수 없는 고유명사 한자까지 한글로 적는 경우다. ‘홍길동’은 ‘길할 길’ ‘아이 동’자로 지은 것이지 ‘길가의 똥’이란 뜻은 아닐 것이다. 일본인의 한자 이름을 ‘가나’로 발음만 적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자 이름의 한글 표기란 제2의 창씨개명과 무엇이 다른가. 국회 의사당의 한글 명패부터가 그렇다. 본명을 놔두고 가명을 쓰는 격이다.
 
한자를 쓰고 있는 세계 인구의 30%, 베세토(베이징·서울·도쿄)가 이끌어갈 동북아시대를 위해서라도 한자는 써야 하고 한·중·일의 교류와 경쟁을 위해서라도 한자는 버릴 수 없다. 대기업 입사 시험에 한자를 보이는 것도 필요성 때문이고 방학 동안 서당 붐이 이는 것도 당연한 안목이다. 대입 수능 필수부터 한자를 포함, 한자 문맹을 막아야 한다. 한자를 모르면 지식이 얇아지고 사려가 얕아진다. 부실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 군상이 세상을 주름잡는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자 교육은 절실하다. /吳東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