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이 필요한데 사용을 허락 하시죠' '의사선생님 수혈만큼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얼마전 한 대학병원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부인의 만성지병이 도져 결국 수술을 해야하는 딱한 입장에 처한 한 직장인이 수술과정에서 필요한 수혈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방안이 없느냐며 한사코 의사의 수혈권고를 거부하고 있으니 진풍경이다. 최근 간염이나 에이즈 등에 감염된 혈액이 수년간 유통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혈액 관리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고 수혜자들 사이에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자체 조사 이후 검찰 수사로 확인된 혈액 관리의 실태는 한마디로 '재앙' 그 자체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잠복한 혈액이 헌혈단계에서 걸러지지 않고, 수혈을 통해 무려 7명에게 에이즈를 감염시켰다. 이들중 3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검사 직원들의 실수로 B형·C형 간염 혈액도 버젓이 수혈돼 8명이 간염에 걸렸다. 엉터리 채혈, 부실한 혈액관리, 무책임한 혈액공급 등 적십자사의 3박자 무능행정이 제대로 맞아돌아가 엄청난 결과를 빚은 것이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오염혈액에 대한 의심으로 수혈 자체를 수용하기 힘들게 됐다. 불량 혈액 유통에 따른 패닉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더욱이 말라리아 감염 혈액에 의해 수혈 환자가 말라리아에 걸린 사례도 4건이나 확인됐고,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혈액이 140여 차례에 걸쳐 의약품 제조 등에 쓰이기도 했으며, 에이즈 혈액으로 판명돼 폐기하고서도 전산 등록을 늦게 하는 바람에 같은 에이즈 감염자가 또 헌혈을 한 사례도 100여건 넘게 적발됐다. 뒤늦게 나선 검찰은 헌혈할 때 병력 조회를 하지 않아 부적격 혈액이 유통되도록 한 혈액관리 부실의 책임을 물어 해당 혈액원장 등 2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및 혈액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무더기로 사법처리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말만들어도 오싹할 노릇이다. 틀림없는 인재(人災)라는 사실에 더욱 몸서리치게 된다. 로또한장에 백년가약이 무너지고 매일 마주치던 이웃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어처구니 없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인명의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수술을 앞두고 환자나 가족들이 중요한 수술결과보다 더 걱정되는 게 수혈이라면 흘려듣기 어렵게 돼 있다. 예방이 가능했던 인재로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고 나서야, 대책마련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대해 국민적 공분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은 어처구니 없는 사후약방문 행정에 노여워하고 있다.
우리 민화에 곳감과 호랑이라는 얘기가 있다. 호랑이가 산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러 내려왔다가 엿듣게 된 내용이 가관이다. 아무리 달래도 듣지않고 울어 제끼던 아이가 호랑이가 아닌 곳감이라는 단어에 한순간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호랑이는 곳감이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인줄 알고 도망가 곳감을 크게 두려워 했다는 그런 내용이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우리나라의 환자나 그 가족들이 겪는 심적인 고통의 원인이 바로 호랑이 때문이 아니라 곳감 때문이라서다. 정작 질병에 대한 수술의 성패 여부 보다는 대한적십자사가 제공하는 혈액이 더 무서운 형국이니 그렇다.
수술보다 두려운게 수혈이라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온 국민이 이구동성 불신의 벽을 높이고 수혈을 기피하면 정작 수술을 감당하는 의술은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환부가 가려운 법이다. 때문에 당장의 혈액사고를 한탄하고 있을게 아니라 이번 기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혈액사업을 선진화시키는 계기로 삼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핵심 사항은 앞으로 이와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문제점을 찾고 개선해 나가는 해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윤인철(논설위원)
곳감보다 무서운 수혈
입력 2004-08-04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4-08-04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
-
투표진행중 2024-11-18 종료
경기도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역점사업이자 도민들의 관심이 집중돼 온 경기국제공항 건설 후보지를 '화성시·평택시·이천시'로 발표했습니다. 어디에 건설되길 바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