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큰 무당 김금화의 굿판을 제대로 즐겼다. 용인 이영미술관이 기획한 박생광 탄생 100주년 특별전 개막 행사로 열린 굿판이었는데, 이 나랏만신은 박 화백이 이승에서 즐겨 그렸던 무녀도의 전속모델이었던 인연으로 그의 천도제를 직접 주관한 것이다. 그런데 굿판을 즐겼다고 말한건 정말 굿판이 즐거워서였다. 70을 훨씬 넘긴 만신(김금화는 1931년 생이다)이 세상을 달관한 듯한 보살의 표정을 짓고 높고 낮게, 길고 짧게 주저리 주저리 무가(巫歌)와 사설을 이어가는 동안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절로 심신의 고단함이 가신듯 때로는 환호하고 가끔은 탄식하며 어느새 한 무리가 되어갔다.
그때 문득 일전에 청와대의 한 인사가 특정 신문사들을 지목해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던 일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저주의 굿판'이라. 그날 큰무당 김금화의 굿판을 지켜보노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유요, 독설이다 싶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우리의 상식에서 저주의 굿판은 없다. 굿의 목적이 그런게 아니라서다. 굿은 신의 사제인 무당이 인간사에 맺힌 이런저런 문제를 신력으로 해소하는 의식이다. 크게는 나라의 안녕에서 부터 촌락의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고 작게는 개인의 수복강녕을 비는 것인데 세상사, 인간사를 어지럽히는 귀신들의 행패를 막는게 굿의 기능이다. 이승 사람과 저승 귀신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니, 차안과 피안의 세계 사이에 맺인 원이 있으면 풀어주고 쌓인 한은 흩어주며 불길한 업보는 씻어주어야 하는데, 모두 무당이 하는 일이다.
그날 큰무당 김금화도 그랬다. 늙은 만신은 한편으론 박생광 생전의 한을 해원(解●)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굿판의 청중들에게 무시로 복을 내렸다. 만신과 그의 제자들이 굿판의 마당 마당을 마무리할 때 마다 축원한 강복(降福)의 내용은 교통사고 나지말라, 건강하라는 개인 개인의 안위에서 부터, 어려운 경제가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나라 걱정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웠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천주교 신자는 성모마리아의 은혜를, 불교신자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으라는 대목에서는 장내에 웃음이 만발했다. 무속을 비하하는 거대종교 까지도 자신의 축원에 수렴하는 큰 무당의 큰 마음그릇이 보기에 좋았고, 자신을 멸시하는 야박한 상대를 덥석 껴안는 전복(顚覆)과 파격(破格)이 빚어낸 해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금화는 마지막 작두를 타는 순간까지 굿판을 지휘하며 청중들을 대동의 한마당으로 이끌었고, 박생광을 극락으로 안내했다.
정치판도 궁극적으론 굿판과 다름 없다. 갈등을 수렴하고 가닥짓고 가능한 모두가 만족하게 흩어주는 과정이 똑같아서다. 굿판이 귀신과 인간의 갈등을 다룬다면 정치판은 세력과 세력간의 갈등을 관장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안타까운건 굿판엔 김금화 같은 큰 무당이 많지만 정치판엔 큰 지도자 보기가 힘들어서다.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은 나라안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중재해야 할 의무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동상생(大同相生)의 굿판을 신명나게 풀어헤쳐야 할 국민의 사제들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어둠속에서 상대를 저주하고, 시비 가릴 일을 싸움으로 만들고, 갈등을 대결로 확대한다면 국민들만 죽어날 것이다. 누구말대로 국민은 지금 저주의 굿판을 지켜보는 스트레스를 감내하느라 지칠대로 지쳤다.
김금화의 사설 처럼 이랑이 고랑되고 고랑이 이랑되는게 인생살이고 역사의 진행방식이다. 서로 주고 받고, 얻고 잃고 하는게 권력인데 이에 매달려 권력준 국민들을 이렇듯 핍박해도 되는 건지, 정치판에 몸담은 사람 모두가 반성해 볼 일이다. 대한민국은 이 땅의 국민들이 천년만년 이어 살아갈 대동상생의 신성한 터전이지, 이랑과 고랑들이 권력을 다툴 땅이 아니니 말이다./윤인수〈논설위원〉
대동상생(大同相生)의 굿판을 열어라
입력 200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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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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