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할머니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커피를 대접받았다. 그 커피에는 설탕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은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설탕 내놓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날 밤 할머니는 자살했다. 할머니는 설탕이 들어 있지 않은 커피를 대접받은 일로 몹시 우울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누가 이 할머니를 비웃을 수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우라 아야코)
지난 주 수원시 자살예방 사업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가 이런저런 자료를 한보따리 받았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청소년용 잡지도 거기 들어 있었다. 책을 펼치자 미우라 아야코의 짧은 인용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사랑하고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하늘 높은 가을날 웬 자살타령이냐고?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여전히 금기어에 가깝다. 웬지 입에 올리기 거북하다. 유명인사의 자살은 매스컴이 앞장서서 시시콜콜 입방아를 찧으면서도, 자살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론할 화제로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통계는 자살이 더이상 은밀한 골방의 언어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사망한 인구는 1만1천명으로 추정된다. 10만명당 24명 꼴이다. 2002년만 해도 헝가리(23.2명), 일본(19.1명), 핀란드(18.8명)에 이어 4위였으나 이제는 1위로 올라섰다. 10년전인 94년엔 10.5명이었으니, 그새 2배반이나 높아진 셈이다.
범위를 좁혀 수원 지역사회만 보자. 2001년 수원시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구는 120명이었다. 지난해는 150명으로 추산된다. 거의 이틀에 한명꼴이다. 1명이 자살로 인해 숨질 경우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10~15배에 이른다.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수원시내 각 병원의 응급실에 실려오는 사람이 연간 1천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에 2명 내지 3명 꼴이다. 게다가 자살을 생각하는 인구, 즉 '잠재적 자살시도 위험군'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지난 9월 자살통계가 나왔을 때 모든 언론이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강조하고 사회적 대책을 촉구했다. 하지만, 자살논의를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이러한 지적은 그저 한번 해보는 소리로 그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편으로는 경쟁을 최우선시하는 물신주의 가치관과 중증 일류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교육환경을 오히려 부추기면서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자'고 외치는 건 지독한 이율배반이다. 잘못된 가치관과 구조를 놔두고 바로 그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저 대열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사실, 어떻게 해야 자살률을 낮출 수 있을지 전문가들도 자신있는 견해를 내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도 해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가 이웃의 절망과 생의 포기를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수원시 자살예방센터'(센터장·이영문 아주대 정신과 교수)와 같은 조직이 그래서 필요하다.
자치단체가 예산을 들여 이런 기구를 지원하는 사례는 수원이 처음이라고 한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안전도시'다운 수범적 사업이다. 2001년 세워진 이 센터에는 현재 39명의 자원봉사자가 214-7942(친구사이)라는 상담전화를 운영하고, 인터넷(ww.csp.or.kr)을 통한 상담사업을 벌인다. 비록 3천500만원 밖에 안되는 적은 예산이지만 다양한 교육·홍보사업도 구상중이다. 다른 자치단체들도 '지역사회의 안정망 구축'을 통해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드는 이웃'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주려는 노력을 이젠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양훈도(논설위원)
수원시 자살예방 센터
입력 2004-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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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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