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자의 틀로 타인을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구걸하는 걸인을 쳐다보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시선이 다르고, 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의 감흥이 다르고, 백인에 대해 느끼는 흑인과 황인종의 의식이 다르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도국과 선진국의 입장이 다르다. 부자(父子)와 남녀와 인종과 국가를 가릴 것 없이 대상이나 현상을 인식하는 틀(Frame)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론의 세상보기는 더욱 심해서 언론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거울(반영) 이론'에 금이 간 건 꽤 오래전이다. 이제는 “뉴스는 사회적으로 생성된 산물이지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라는 비판주의적 관점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는 추세다.
 
이런 관점을 전제한다면 세상은 각자의 틀로 현실을 규정하는 무수한 개인과 집단이 어울려 사는 무대인 셈이다. 그래서 세상은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지며 역동적으로 굴러간다. 물론 틀을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이 서로 존중하거나 최소한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자기 주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판이한 이들이 모두 적대한다면 끔찍한 세상이 될테니 그렇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런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당 자체가 그 사회의 유력한 틀을 대표하는 결사이다. 그러니 정당 마다 정책 틀이 다르거나, 대통령 마다 통치의 틀이 다른 건 너무 당연하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현실로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진보의 틀로 통치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나, 야당인 한나라당이 보수적 틀로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행위, 민주노동당이 급진적 틀로 여야를 비판하는 활동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상대의 틀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폐기 대상으로 보는데 있다.
 
지난주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이전특별법 위헌 결정은 우리 정치권의 적대의식을 적나라하게 까발려놓았다. 위헌 결정에 대해 대통령과 여당은 위헌의 근거인 관습헌법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일단 국회 연설을 통해 위헌결정의 법적 효력까지는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여권내부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의(敵意)로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이 여전하다. 유시민 의원 등은 헌재 재판관들에게 공개 맞장 토론을 요구하며 으르렁대고 있다. 하도 기세가 등등해 재판관들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비겁자 소리를 듣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다. 이들이 보이는 적의는 헌재 또한 야당의 보수 틀에 포함됐다는 혐의를 두는데서 비롯된 듯 하다.
 
한나라당 소속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국민의 승리로 규정하며 헌재 결정에 경의를 표했다. 당 지도부는 '표정관리'를 당부하는 쪽지의 명에 따라 자제했지만 헌재 결정에 박수까지 안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승리감은 그 자체가 적대감을 전제한 전투적 감정 아닌가. 헌재 결정이 뒤바뀌었다면 여야의 표정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틀은 '적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존중하지 않고 적대하는 우리 정치의 슬픈 자화상, 이제는 찢어버릴 때도 됐다. 서로 존중하지 않으니, 여론의 추이와 헌재의 결정에 정치를 맡겨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 아닌가. 어차피 각자의 틀에 따라 하는 정치인데, 그 틀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그 자체가 무수한 틀 간의 교직(交織)인 사회와 국가, 국민을 부정하는 짓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먼저 변했으면 좋겠다. 정부·여당은 경제부흥을 위한 한국판 뉴딜, 뉴딜적 종합투자계획을 강조하지만, 정작 심각하게 차용을 검토할 건 뉴딜을 성공적으로 이끈 루스벨트의 설득형 통치행위이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에게, 야당에게 편안한 표정으로 정부·여당의 정책과 비전을 사근사근 설득해주는 모습을 이제라도 자주 보았으면 정말 좋겠다./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