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풍경이 지금처럼 우울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중동 산유국의 횡포로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보내봤고, IMF경제위기에 감원의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겨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고통을 같이 이겨내려는 사회적 합의라도 있었다. 아이들은 고사리손을 호호불어 에너지절약 포스터를 그리며 성장주도세력으로 커나갔고, IMF때는 금붙이를 들고나선 시민들끼리 공동체의 진한 연대를 나누며 오히려 행복했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누구도 소외를 원치 않는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끊임없는 연대의 확인 과정이다. 집단내에서 안전하다는 연대감은 삶을 유지시키는 순도 높은 엔돌핀인 셈이다. 집단적 위기가 집단의 발전으로 승화되는 건 이같은 연대의 확인과정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위기를 말하면서도 '위기속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체념하고 있으니 진정한 위기는 이 때문이다. 장롱속에서 굶어죽은 어린 소년의 비극은 연대 없이 파편화된 우리 사회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순전히 아이 입장에서만 보면 꼬마의 비극은 부모를 잘못 둔 탓이다. 벌어먹이지 못하면 먹을 수 있는데다 버려라도 줄 일이지 장롱속에 가두다니, 폭력보다 더한 체념이요 무지가 아닌가. 장롱 문짝을 경계로 이승과 저승이 공존했던 그 비극적인 체념의 공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일거리 잃은 아버지와 정신지체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들도 모두 굶어죽을 심산 아니었을까. 그 집안의 텅빈 냉장고가 그들의 체념어린 각오를 흉칙하게 증명하고 있잖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꼬마의 부모 대신, 우리의 공허하고도 전시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치열하게 비난한다. 4살박이가 장롱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동안 이웃들은, 동사무소 직원들은 무엇을 했던가. 엽기적인 비극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비극에 책임질 희생양을 찾느라, 이렇듯 분주하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를 대신해 아이의 죽음에 책임질 사람들을 지어낸다 해서 우리의 책임은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순간 부터 두발 뻗고 편한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질 않은게, 장롱속 꼬마의 비극은 우리를 덮친 불황의 한파가 앗아갈 무수한 생떼 같은 목숨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 사회 비극의 시작일 수 있어서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질 못하는 세상이다. 아이의 비극에 우리 사회 전체가 연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런 일이 발생할 때 마다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아야 하는 가혹한 악순환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연대를 이룰 것인가. 역사의 고비 마다 출현했던 위대한 인간, 위인을 기다려야 할 일인가. 아니다. 위인이 위력을 발휘할 시대가 아니다. 저마다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위인이라니···. 결국 연대의 지름길은 정치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정치? 장롱속 아이의 비극이 정치현안이 되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발생해선 안될 불행한 일'이라는 각당 대변인들의 천편일률적인 논평을 제외하고는 정략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여당은 이러한 불행을 막기위해서라도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보다는 분배정책이 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마 한나라당은 날품거리라도 공급했더라면 아버지가 아들을 굶겨죽이는 일이 일어났겠냐며, 집권여당의 망국적인 경제정책에 대해 진상조사를 하자고 난리 피울지도 모르겠다.
정치 분야의 소통불능이 우리 사회 위기의 전부라면 지나친 진단일까. 지금 처럼 위기속에서도 사람들이 분분이 흩어져 정략적인 대립지형을 형성했던 기억이 없다. 수많은 코드의 분할이 바람직한 건 시민사회의 얘기다. 정치는 모든 코드가 접속가능해야 하는 멀티코드 집단이어야 할 텐데, 지금 우리 정치는 오직 한가지 전압만을 요구한다. 110볼트이던지 220볼트이던지···. 장롱속의 그 아이는 소통불능 사회를 향해 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윤인수〈논설위원〉
장롱속의 아이
입력 200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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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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