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크고 작은 시비를 목격하기도 하고 휘말리기도 한다. 그런 시비가 절정에 달하면 '법대로 하자'며 서로를 어르는 지경에 이르기 일쑤고, 실제로 법대로 해결하고픈 심경을 경험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비는 법정에 이르기 전에 인간적으로 해결된다. '법대로 하자'는 으름장이 실제상황으로 벌어졌을 때의 골치 아픈 상황을 잘 알아서다. 법으로 시비를 따지는 일이 대부분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수반해서다. 그리고 일단 송사에 엮이게 되면 주변의 관심이 부담이다. 그것이 '동정'이든 '비난'이든 간에 주변 여론의 중심에 선다는 게 보통사람으로선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서다.
그래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억울한 사람은 침묵하는 부조리가 수시로 일어난다. 노일레 노이만은 소수의 주도적 여론이 전체 여론으로 확산되는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언론의 효과를 설명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설명할 때도 침묵의 나선이론은 적절할 때가 많다.
객소리를 길게 늘인 것은 '건빵 도시락' 파문 때문이다. 지금까지 파문의 전개과정을 보면 초점은 건빵 도시락에만 맞추어져 있지, 정작 그 도시락을 배달받았던 결식아동들의 고통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여론은 상식을 배반한 도시락 메뉴에 경악하고 분노했다. 불같은 여론의 화살은 곧바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비양심적인 도시락 공급업자에게로 향했다. 급식을 제공한 결식아동을 7만에서 40만으로 늘린다면서도 어떻게 전해줄건지, 도시락은 어떻게 꾸릴건지 안중에 없었던 무뇌(無腦)행정을 질타했다. 또 그것도 알량한 사업이라 이문을 남기겠다고, 결식아동들의 반찬 값을 떼먹은 업자들의 상혼이 여론의 노도(怒濤)에 휩쓸렸다. 그래서 복지부장관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고 고개를 떨구었고, 여당은 진상조사단을 꾸린다 난리를 피우고, 검찰은 관련 공무원과 업자들을 수사한다며 법석이다.
그런데 정작 목소리를 내야 할 주인공은 여론의 목청에 짓눌려 침묵한 채 치유하기 힘든 고통을 되새김질 하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바로 건빵 도시락을 건네받았던 아이들이다. 그 부실한 한끼 도시락도 감사하게 먹었다며 도시락통에 '사랑의 편지'를 담아 되돌려준 그 아이들 말이다. 사회의 온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해맑은 동심이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었던 그 도시락이 한순간에 사람이 먹어선 안될 '양심 불량'으로 둔갑했을 때 아이들 또한 경악했을 것이다. 또 건빵 도시락에 그토록 많은 불량스러운 어른들이 개입됐다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국가의 보호나 사회의 지원을 당당히 누려야 할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 보호와 지원이 씻지 못할 비참함으로 남게 됐으니 슬픈 일이다.
그나마 한번의 아픔이면 괜찮을지 모른다. 정부고 민간단체고 언론이고 앞을 다투어 '결식아동'을 되뇌이며 대책을 읊조리고 있으니 이 또한 고통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뾰족한 대책이 나온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배달인력을 확보하기 힘들자 식권을 주네 어쩌네 하며 부끄러운 줄을 세우려 하니 그 또한 고통이다. 지금 40만의 아이들은 차라리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기를 간절히 원할지도 모른다. 정부가, 시민단체가, 언론이 한마디 할 때 마다 느껴야 할 비참한 기분에서 하루 빨리 해방되고 싶을테니 그렇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가. 법과 절차에 따라 실적만 달성하는 '법대로 행정' 때문이다. 도대체 행정에 인간의 숨결이 스미지 않아서다. '이정도면 양호한 것 아니냐'는 군산 부시장의 발언은 실언이 아니라 냉혈 행정의 대변이다. 인간미 없는 행정이 순수한 동심을 짓밟았다. 건빵 도시락이 아이들을 대신해 우리 사회가 인간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할 때라고 외치고 있다./윤인수〈논설위원〉
도시락 행정이 짓밟은 童心
입력 2005-01-19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5-01-19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