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날은 그래도 행복했다. 쿠웨이트 골문을 시원스레 2대0으로 뚫어준 월드컵 예선 축구 덕분이었다. 그 시간만은 체불 임금을 주지 못해 몸을 피한 중소기업 사장도 여인숙 TV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열을 올렸고 선물 꾸러미 챙길 돈이 없어 고향의 뿌리로, 피붙이 곁으로 가지 못한 나그네 설움 근로자들도 단칸 방 문고리가 떨어져나갈 듯 고함을 쳤는가 하면 홀로 사는 노인도, 병실의 백혈병 어린 천사들도 핏기 마른 손, 고사리 손이 터지도록 손뼉을 쳐댔다. 서울역, 수원역 노숙자도 굴러가는 공을 쫓아 벌쭉벌쭉 웃음을 굴렸고…. 2대0 그 순간만은 90으로 솟구친 이 땅의 국민 행복지수였다.
같은 시간 북한과 싸운 일본 축구 열기도 대단했다. 시청률이 무려 57.7%였다고 했다. 1억3천의 57.7%라면 자그마치 7천500만 인구가 지하의 지진 신이 놀라도록 발을 구르며 와 와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건 북한은 중계를 하지 않았다는 외신 보도였다. 중계 비용 때문인가, 아니면 2대1로 질 거라는 점괘를 믿었던 것인가. 이유야 어떻든 말이 안 되는 그 이유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 날 저녁 조선중앙TV는 설날 특집 노래 프로와 영화를 방영했고 축구가 한창인 8시 뉴스 대엔 63회 생일을 앞둔 김정일 총서기에게 보낸 해외 각국의 선물을 소개하는 게 주요 뉴스였을 뿐 축구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정일화(花) 축제에 마냥 도취해 있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와 북한 인민은 월드컵 예선 축구에 그토록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인가. 축구보다는 ‘하늘이 낸(天出) 지도자’께서 받으신 생신 선물이 천 배나 만 배나 더 궁금하고 즐겁다는 것인가! 만약에 한국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을 2대0으로 이긴 축구를 중개하지 않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 시간 축구 중계는 하지 않고 북한 인민의 팜파도어(pompadour) 올백 머리형의 노무현 대통령이 보톡스 주사를 맞고 쌍꺼풀 수술을, 의학 용어로는 안검하수(眼瞼下垂)증, 상안검이완증(上眼瞼弛緩症) 수술을 받는 장면에서부터 검은 테 안경을 쓰고 공석에 나타날 때까지를 상세히 생중계한다든지 북한 핵의 긴급 사태에도 느긋하게 오페라 감상 석에 앉은 노 대통령 얼굴이나 보여주고 있었다면 이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성난 벌 떼 같은 네티즌들로 축구협회, 대한체육회, 문화체육부의 전화는 물론, 홈페이지는 금세 녹다운됐을 것이고 돌팔매에 맞아 방송국 유리창깨나 깨져나갔을 것이다. 드디어 대통령 탄핵까지 땅땅땅 국회를 통과해도 단상에 올라 울부짖는 국회의원 하나 없을지도 모른다.
일본과 북한의 차이는 확연하다. 일본 축구 시청자 7천500만과 전혀 보지 않은 북한의 0명 차이다. 남북한 차이도 2천여만과 0명의 갭이다. 북한이 입만 열면 사수하겠다는 그쪽 체제가 그토록 좋은 지상낙원이라면 설날 벌어진 축구부터 신명나게 응원하는 즐거움쯤은 배급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도 그 날 축구를 했는지조차 모를 북한 인민의 행복을 지구촌의 어떤 머저리 국가가 인정할 수 있으랴. 축구 중계도 하지 않는 나라가 지금 골몰하는 건 오직 ‘호랑이와 고슴도치’ 동화뿐이다. 짐승들이 모여 힘 센 내기를 했는데 당연히 호랑이가 먼저 나서자 감히 맞장을 뜨겠다는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고슴도치가 냉큼 호랑이 콧잔등에 달라붙어 가시로 찔러대자 호랑이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는 얘긴데 그 호랑이가 바로 미국이고 북한은 고슴도치라는 것이고 한 판 붙으면 북한이 이긴다는 것이다.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라는 북한의 구호는 여전히 ‘전쟁 수행 능력 무한대’며 ‘장군님 체제 사수’다. 식량 배급이 금년 들어 1인당 하루 300g에서 250g으로 줄어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녀러븐! 설날 축구 하나 보지 못하는 북한 동포 녀러븐! 지금 어디로들 가고 있는 것입네까?/吳東煥(논설위원)
축구 중계도 안 하는 나라
입력 2005-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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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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