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프라가 한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얘기는 이제 상식이다. 부천시는 이런 상식을 상식으로 정착시킨 도시다. 97년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를 개최하기 전만 해도 부천시는 수도권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장과 사람이 밀집한 공해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제를 개최하면서 도시의 운명이 달라졌다. '사랑과 환상과 모험'이라는 영화제의 테마와 같이 국내외에서 몰려든 영화와 영화인들로 도시 전체에 환상적인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고 그 활력은 전체 시민들에게 전이돼 부천은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로 변신했다. 이제 부천은 대한민국만의 지명이 아니라 세계적 지명으로 성가가 높다. 부천은 부천시민만의 도시가 아니라, 판타스틱 영화장르를 추구하는 세계 영화인들의 메카로 성장했다. 공해에 찌든 회색도시 부천에 영화제가 총천연색 생명의 색깔을 입혀준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고 아홉수의 고비는 반드시 겪게 마련인 것인지 올해로 9회를 맞는 부천영화제가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태로우니 큰 걱정이다. 위기의 전말은 세상에 알려진대로다. 부천국제영화제의 오늘을 만들어낸 김홍준 전집행위원장을 부천시가 해촉하면서 부터다. 지난해 영화제 개막행사에서 부천시장을 소개할 때 그 이름을 깜박한 김 위원장에게 불경죄를 물은 것이다. 이에 영화인들은 작품 출품을 거부하고 영화제 불참을 결의했고, 후임 집행위원장은 며칠인가 상황을 지켜보더니 자리를 내던지고 말았다. 부천시의 오기 또한 만만치 않다. 집행위원장 없이 영화제를 열겠다고 뻗대고 있으니 그렇다. 터무니없는 시장님의 신경질과 공무원들의 심기 보좌로 부천 시민과 세계 영화인들의 영화제가 표류하는 사태에 이르렀으니 어이없는 일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천영화제를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솟구친 건 당연하다. 부천시민과 지역 문화계가 부천시를 나무라는 한편 영화계를 달래며 화해를 종용한 것은 영화제의 성공적인 유지를 염원하는 마음에서다. 이런 판국에 부천영화제 전임 프로그래머들이 '반(反)부천영화제'를 제9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기간중에 개최키로 결정했다니 유감 천만의 일이다. 문화를 행정에 종속시키려는 공무원들이야 그렇다 치고, 영화를 사랑하고 문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영화인들 마저 '갈데 까지 가보자'는 감정을 표출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부천국제영화제는 부천시만의 영화제가 아니요, 한국 영화인들만의 영화제가 아니다. 해마다 연륜을 더해가면서 국제적인 영화축제로 그 위상을 높인지 오래다. 시정(市井)에서나 볼수 있는 천박한 말싸움과 기싸움으로 망가뜨릴 영화제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천시와 영화계는 화해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먼저 부천시가 영화계에 진심어린 사과를 함으로써 화해의 물꼬를 트는 것이 옳다.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영화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시장으로서 백번인들 사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과와 함께 영화제 운영의 전권을 영화인들에게 넘길 것을 약속해야 한다. 영화제는 영화인에게 맡기고, 시장은 영화제를 도시의 성장동력으로 활용하는 시정을 펼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영화계 또한 한국의 영화문화 발전이라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부천영화제의 정상화에 동참해야 한다. 부천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 소중한 축제의 장이다. 세계 영화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한국 영화발전을 도모하는 큰 마당으로 부천영화제를 키우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관용의 미덕을 최대한 발휘해주기 바란다.
 
부천 보다 한해 먼저 국제영화제를 시작한 부산시가 영화제만으로 거두는 경제유발효과는 한해 500억원이 넘는다. 이러니 부산시가 영화산업을 시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수선을 피우는 건 당연하다. 이 모든 일이 부산국제영화제가 뒤를 받치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제 부천시가 뭔가 보여줄 차례다./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