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카롤 보이티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 그동안 수차례나 선종 직전의 고비에서 용케 되돌아와서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자상한 미소와 손짓으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던 그였다. 바티칸 교황청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는 마침내 천국의 문을 열어주어 그를 맞아들였고 가톨릭 국가와 신자들은 물론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에 이르기 까지 세계는 지금 그를 추모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제 성속(聖俗)의 역사가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다만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참으로 강렬해 사제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그의 크기가 남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하다, 행복하라! 말문이 트이고 문자를 남기게 된 이후 모든 인류가 소망했던 삶이다. 사실 동서고금 인류가 심혈을 기울여 모색했던 인간적 삶의 요체는 '행복한 삶'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주의와 사상은 하나같이 행복추구에 대한 사유의 집적인 셈이고 실천강령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신의 계율에 따르든 인간적 이성과 상식에 의지하든 행복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도속에서 항상 상처주고 상처받으며 살고 있다. 하기야 절대적 신념인 종교와 세속적 삶의 규칙인 법과 제도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완벽한 행복을 실현하기엔 자질이 부족한 종(種)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행복하라'는 교황의 유언은 평생 신의 말씀을 실천한 사제의 보람이 담겨있는 진심일테고, 현실의 인간들에게 한없이 부러운 인간 밖의 경지일 수 밖에 없다.
구태여 요한 바오로 2세를 인간세로 끌어내려 평가한다 해도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고 그 행복의 근원은 화해에서 비롯된 듯 하다. 그는 종교간 대화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했고 기도교인의 유대인 박해에 대해 사과를 했다. 분쟁과 격변의 현장을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생을 바쳤다. 살아생전에 가톨릭 개혁을 저지시킨 보수 반동이라며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비판했던 신학자 한스 큉 마저도 그를 '위대한 전달자(great communicator)'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저 혼자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무리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회적 존재라서다. 가장 작은 가족사회 부터 국가사회에 이르기 까지 사회의 전반적 행복지수가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오늘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는 영 신통치 않다. 가족 공동체는 물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공동체가 파편화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어서다. 정치권의 대립은 너무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이다. 학교는 교육주체간의 무관심과 소통장애로 황량해진지 오래다. 경제는 어떤가. 가진자와 못가진자간의 투쟁이 가열되면서 두집단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이러니 가정은 해체되고 국가 사회는 사분오열의 질곡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대화에 있다. 무리 동물인 인간의 삶은 의사의 소통을 전제로 가능하다. 의사의 소통은 당연히 대화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땅에 넘쳐나는 노선과 이념 투쟁도 모두가 행복하자고 벌여놓은 대화의 마당이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말에 귀를 닫으면 삶을 이어가기 위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의사를 소통시키면서 과거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화해가 가능하고 내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라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 구성원 각자가 행복의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온갖 주의와 이념의 과잉으로 불행하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행복한 사회를 외치는 주장만 있을 뿐 행복한 대화가 없는 시대다. 교황의 선종 메시지가 유난히 가슴을 때리는 이유다./윤인수〈논설위원〉
행복하다, 행복하라
입력 200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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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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