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애인의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사회 곳곳에서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행사가 나름대로 풍성하게 열리고 있다. 물론 하루만이라도 몸이 불편한 이들이 즐거운 마음을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에서 일게다. 다채로운 행사에 장애를 가진 불우 이웃이 혹시 소외되고 외면당해 더욱 쓸쓸한 하루를 보내고 있지나 않는지 되돌아 보는 여유가 필요한 때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신체적 장애를 갖는 것은 개인으로 볼때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천적 장애도 있을 수가 있고 뒤늦은 질병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장애도 있다. 이는 장애가 선택불가능할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고 불시에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장애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으로 복지정책의 우선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 문제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 '대한민국에 장애인 인권은 없다'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84개의 시민사회단체가 벌써 4년째 정부의 기념행사를 거부하고 있다. 거듭되는 장애인 차별정책을 비난하며 '차별철폐공동투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말로만 차별금지를 외칠 뿐 차별해소를 위한 사회복지 정책의 부재가 장애우들을 분노케 하는 것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넘어 2만달러 소득을 지향하는 현실이고 보면 최소한 선진국 기준에 부응하는 장애인 정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장애인 40%가 이동권에 제약을 받아 스스로가 사회적응을 못하는 실정이며 70%가 넘는 장애인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50% 이상의 장애인은 초등학교 학력 이하라는 수치에 이르면 빛나는 복지구호 바로 밑 어둠속에서 소외된 장애우의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정도라면 복지정책이 실현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동안의 경제성장의 혜택으로 장애인복지도 많이 나아졌을 것이란 비장애인의 판단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발생한 오판일 뿐이다. 여전히 도시는 장애인의 이동을 막는 '턱'으로 즐비하고 중증장애인은 활동력 차단으로 최소한의 생활보장이 안된다며 몸을 던져 항변하며 목숨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얼마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건립한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수원의 영통종합사회복지관이 장애인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며 이용자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정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곧바로 개선하겠다는 답변이 나왔으나 역시 뒤끝은 개운치 않다. 명색이 복지관 아닌가. 장애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복지관은 비상식적이다. 복지관이 이모양이니 다른 공공기관이나 공공시설물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언하고 아무리 개선을 다짐해도 여전히 장애인은 정부의 구제불능인 복지마인드 앞에서 또다시 절망하고 만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정책은 이제 포괄적 의미에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장애인의 인권을 수혜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배려나 선행의 차원으로 여겨선 안된다. 이제는 이들의 인권을 당당한 권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특히 이들을 위한 정책이 이들로부터 불편하고 효용성이 없다고 외면당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책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종전의 사회복지정책은 주체는 외면한 채 정부의 임무를 유지하는데 급급했다. 이제부터는 장애인의 자활능력 배양과 이들이 인간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복지정책의 기본을 새로 세워야 할 때이다. 장애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이다. 따라서 장애인을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서 이해하고 편견없이 받아들이며 장애인을 장애인 정책의 주체로 존중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한치앞을 못보는 복지정책이야 말로 국가에 장애를 초래할 것이다. /윤인철(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