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주재의 수도권발전대책회의에서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총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상황에서 내가 이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반발했다. 수도권 규제완화 요구를 이해찬 총리가 '대통령이 시킨다 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한 직후다. 건교부 장관은 '경기도만 도냐'고 독설을 내뱉었다.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손 지사를 향해 연일 쌍포를 퍼붓고 있다. (대권에 집착해) 수도권 정책을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이용한다는 거다. 여당 대변인은 손 지사의 최근 행보가 '정치권에서 사라져야 할 낡은 정치행태'라고 몰아쳤다. 총리실은 더 사납다. 이 총리는 '정치 논리의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일개 도백(道伯)을 향한 정부·여당의 집요한 공세는 손 지사의 완승을 반증한다. 진 X이 더 말 많고 시끄럽다는 건 다섯살 꼬마들도 다 아는 경험칙이다. 정부·여당이 악악댈수록 괜한 오해를 부르고 손해만 커질 뿐이다. 일부 언론은 '손학규의 한판승'이라고 단정했다.
한나라당도 손 지사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다. 겉으로는 '손 지사 구하기' 모양새지만 이 참에 정부와 여당의 경제 실정(失政)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투다. 싸움은 보는 것도 좋지만 슬쩍 끼어들어 어느 한쪽을 죽쑤게 만드는 게 갑절 재미나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4·30 재보선의 압승으로 거둬들인 여소야대의 전리품을 써 먹지 못해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자리를 박찬 무례(無禮)와 파격(破格)이 오히려 빛을 발한 건 명분과 타이밍이다.
'(수도권내 외국기업의 투자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 총리의 말은 정부가 정부 방침을 스스로 번복한 꼴인 어처구니 없는 완착이다. 경기도와 산자부는 이미 외투기업 유치에 대해 잠정 합의한 상태였다. '수도권 이용하기'라는 정부·여당의 폄훼에도 불구, 정작 손 지사의 손을 들어준 건 정부 일각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다. 일부 여당의원은 아예 수도권 정비법의 전면 손질을 들고 나왔다. 해괴하게도 야당 도지사를 편드는 여권의 반란은 이 총리의 궁색한 명분이 자초한 셈이다.
지금은 민심도 돌아선 때다.
여당이 단 한석도 건지지 못한 4·30 재·보선의 참패를 두고도 여당은 공천 탓을 하고 청와대는 말문을 닫아 버렸다. 대통령 지지도는 다시 곤두박질이다. 회복 국면이라던 국내 경제는 지난 1/4분기 성장률이 고작 2%대에 머물렀다. 국민들은 여전히 바닥인 경제가 불안하고 답답하다.
그런데, 경기도지사는 정부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제에 놀라 수도권에 공장을 지으려던 외국기업이 돌아갈 처지라고 아우성 친다. 분통 터지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 70%가 수도권의 공장 신·증설 허용을 찬성한다지 않는가.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도 외투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을 일부 허용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잘만 되면 국내 대기업들에게도 빗장이 열릴 조짐이다.
불과 두어달전, 손 지사는 행정수도의 암초에 걸려 생고생을 했다. 비록 속은 시커멓게 타버렸어도 도백은 늘 도민들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이치를 새삼 가슴에 담았을 터다.
경기도백인 이상 수도권을 억누르는 중앙정부와의 갈등은 필연이다. 맞장을 뜨고 넘어서야 할 대상이다. 정치는 생명체 처럼 늘 요동친다. 현 상황이 어떻게 바뀔 지 아무도 모른다. 벌써 중앙정부와 지방 연합군은 한 목소리로 경기도를 타박할 태세다. 이럴때 일수록 꿋꿋하게 도정(道政)을 이끌어야 한다. 도백이 아닌 '정치인 손학규'의 꿈도 이제부터가 관건일 것이다./홍정표(사회부장)
명분과 타이밍
입력 2005-05-17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5-05-17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