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이 실시한 '개방형 공채'가 화제다. 학력 나이 성별을 묻지 않고 신입행원을 뽑았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한다. 40대 '고령'이 10명, 전업주부가 5명, 고졸자와 2년제 전문대 졸업자도 10명이 넘었다. 경상계나 어문계가 아니면 원서도 넣기 힘들었던 신입행원에 이공계 출신이 6명이나 끼였다는 점도 이채롭다. 대학별로 봐도 지방대 10곳을 비롯해 33개 대학 출신이 붙었다. 능력과 적성, 인성 만으로 선발한 결과라는 게 은행측 설명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이거 기쁜 소식인가, 서글픈 소식인가.

 잠시 2002년 초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당시 교육부총리가 기업체의 입사지원서에서 학력란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학력란을 철폐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폐지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학력란 없앤다고 뿌리깊은 학벌주의 연고주의가 치유될까마는 그렇게라도 노력해 나가야 교육과 사회가 바로 설 게 아니냐는 아주 작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뭇매'를 맞았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경제부총리와 국무회의스럽지 못한 설전을 벌여야 했다. 일부 언론의 십자포화도 이어졌다. '위헌 소지가 있는 획일적 수평주의 발상'이라는 규정에서부터 '홍위병식 학벌 평준화 밀어붙이기'라는 욕설까지 들었다. 결국, 며칠 후 개각에서 그 교육부총리는 낙마했다. 입사원서 학력란 폐지유도 소신이 결정적인 퇴진 사유였다고는 지금도 믿고 싶지 않다. 설마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교육수장을 갈아치우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불과 3년반 남짓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 사이 '학력난'과 관련해서 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전력, 한국방송공사 등 일부 공기업에서 입사지원서에서 학력난을 없앴다. 이랜드 등 일부 민간 기업에서도 자진해서 학력난을 폐지했다. 급기야 학력 나이 성별을 묻지않고 행원을 뽑는 은행까지 생겼다. 디지털 세상에서 1년은 10년 맞잽이라고는 하지만, '학력난을 없애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던 교육부총리가 잘린 일이 마치 한 세대 전 '그 때를 아십니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개방형 공채'는 분명 진일보다. 이게 뉴스가 되는 건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흘러갈 밝은 전조처럼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몇년 전 '학력란 고수주의자'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지금도 '무한경쟁 시대에 낙오를 자초하는 인재 선발방식'이라고 거품을 물까. 혹시, 안면를 싹 바꿔 '글로벌 스탠더드'를 아는 선진 인사기법이라고 반기는 건 아닐까.

 어쨌거나 좋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운다고 곧 가을은 아니겠지만, 풀벌레가 가을의 전령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2008년 대학입시, 그것도 일류대 입시방식만을 놓고 온 나라가 법석을 떨고, 국내 최고 기업은 모든 분야의 인재를 블랙홀처럼 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임·직원의 사돈의 팔촌까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조사하는 '학벌·정실공화국 대한민국'이지만, 21세기 일터에는 스카이 졸업장과 연고가 아니라 능력·적성·인성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가는 한 한줄기 희망은 있다. 외환은행의 '개방형 공채'가 서글프면서도 기쁜 소식인 까닭은 거기에 있다.

 물론 낙관하기는 이르다. 학교교육은 여전히 능력·적성·인성보다 성적으로 한줄세우기에 열중하고, 사회는 탐욕과 연고주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외환은행 개방형 공채를 뚫은 40대, 전업주부, 전문대 졸업생은 억세게 재수좋은 1회용 신화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