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Ⅱ)가 승하하자 CNN을 비롯한 미국 방송은 연일 ‘팝 잔 폴 세컨’을 연발했다.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같은 폴란드 사람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도 호색한(好色漢)이라도 떠올리는 것인지 거침없이 ‘레치’하고도 ‘웨일사’라 불렀다. 지난 22일 수상자를 발표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선 폴란드의 라파우 브레하치가 우승, 한국인 임동민·동혁 형제가 3위, 일본인 야마모토(山本貴志) 등이 4위에 입상했지만 그 최고 권위의 쇼팽 콩쿠르(Chopin concours)도 영어권 방송에선 ‘초핀 콘쿼’로 발음했다.

 예수를 ‘지저스’로, 나폴레옹을 ‘너폴련’, 바흐(Bach)를 ‘박’, 모차르트를 ‘마잣’, 베토벤을 ‘비도븐’이라 발음하는 건 영어의 지나친 오만이고 빅토르 위고를 ‘빅터 휴고’, 고흐(Gogh)를 ‘곡’ 또는 ‘고프’, 고갱(Gauguin)을 ‘고긴’이라 호칭하는 건 영어의 어이없는 방자함이다. 아르헨티나를 아진티나, 요르단(Jordan)을 조단, 바그다드를 백댓, 산호세를 샌조스라 하는 것도 그렇고 뮌헨을 뮤니크(Munich)라 부르는 건 더욱 그렇다. 각국의 언어엔 특유한 발음이 있고 지명, 인명에도 특유의 독음(讀音)이 있거늘 영어는 그 점을 싹 무시하는 것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조지(George)만 해도 지오르지오(이), 게오르크(독), 조르지(프), 조르제(포), 호르헤(에)로 각각 다르고 헨리(Henry)도 하인리히(독), 앙리(프), 엔리코(이), 엔리케(에), 엥리케(포), 헨리크(네), 하인리크(덴) 등으로 다르지 않은가.

 제2의 국제어로 몇 년 안에 영어를 추월할 것이라는 중국어의 오만 또한 영어에 못지 않다. 데궈(德國), 파궈(法國), 빠시(巴西), 난페이(南非), 비루(秘魯)라 하면 각각 독일, 프랑스, 브라질, 남아공, 페루를 가리킨다. 미국은 아메리카가 아닌 메이궈(美國), 영국은 잉글랜드가 아닌 잉궈(英國), 일본은 닛폰이 아닌 리벤(日本)이고 도쿄는 둥징(東京), 오사카는 따반(大阪), 아키히토는 밍렌(明仁), 고이즈미는 샤오촨(小泉)이다. 이에 맞선 일본어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어림없는 소리다. 일본식 발음 그대로 ‘고타구민’ ‘고긴토’ ‘온가호’일 뿐이고 페킹(北京)일 뿐이다. 미국도 ‘쌀 미’자의 ‘베이고쿠(米國)’, 영국은 ‘이기리스’, 네덜란드는 ‘오란다’다.

 반면에 한국의 중국 고유명사 표기는 어떤가. 한 마디로 줏대 없고 또 한 마디로 주체성 없는 언어 식민지 의식 그것이다. 중국이 한·중 수교 13년이 지나도록 서울을 ‘한청(漢城)’이라 부르고 인천을 ‘렌촨(仁川)’ 수원을 ‘쉬위안(水原)’이라 하는데 우리는 왜 북경(北京)을 베이징, 상해(上海)를 상하이, 낙양(洛陽)을 뤄양이라 불러야 하는가. 헤이룽장(黑龍江)이니 양쯔장(揚子江)은 또 무엇인가. 강택민과 호금도를 ‘장쩌민’ ‘후진타오’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노신(魯迅)을 루쉰, 지난 17일 101세로 타계한 작가 파금(巴金)을 바진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다. 그럼 공자도 콩쯔, 맹자도 멍쯔, 장자도 좡쯔, 노자도 라오쯔, 유비도 류베이, 당나라도 탕나라로 불러야 한다. 더구나 어떤 언어보다도 중국어는 한글 표기가 어렵고 표기 음절도 늘어난다. 한데 신기한 건 북한이 대형국(大兄國)인 중국의 북경, 강택민, 호금도를 그대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나라 언어는 그 나라 발음을 따라 주는 게 원칙이고 그래야 그 나라 사람도 듣기에 좋다. 유네스코가 엊그제 ‘문화다양성협약(Cultural Diversity Convention)’을 채택한 것도 각국의 문화주권, 언어주권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이 한국에 대해 일방적으로 중국어 식으로 발음하는데 반해 우리만 한국어 식이 아닌 중국어 식 발음을 좇는다면 마치 한쪽에선 의젓잖은 반말만 해대는데 한쪽에선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 경우와도 같고 종속국가, 식민지 백성 같지 않은가.
/吳東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