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불행은 끝이 없다. 권력의 이중성 때문이다. 권력은 쟁취의 대상이자 분배의 대상이다. 권력은 인간 집단을 소유자와 위임자로 구분하는 힘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권력은 대중으로 부터 나오지만 반드시 대중의 이익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권력자나 소수집단의 이익 실현에 기여하기 쉽다. 권력의 이런 속성 때문에 권력의 담론이나 행위는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나 인본적 규범인 인륜을 초월하기 쉽다. 마키아벨리즘은 목적이 선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며 정치권력을 초월적으로 정의한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진의와는 거리가 멀다. 또 브루투스가 자신을 아들 처럼 아꼈던 카이사르의 등 뒤에 단검을 꽂은 패륜도, '공화정의 단검이 제정의 심장을 찌른' 권력 행위로 치환하면 역사상 주목할만 한 사건이 된다.
아무튼 인류는 권력의 폐해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 담론을 진화시켜왔고, 그 결과 권력의 주인 자리에 국민, 시민으로 일컬어지는 대중을 세운게 불과 2~3세기 전의 일이다. 즉 대중이 위임하고 인정한 권한과 권위로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권력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권력이 대의(代議)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 담론의 형식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세기, 대중이 행복했던 시절은 드물다. 권력의 모태를 총칼로 규정한 수많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대중에게 무자비한 권력을 휘둘렀다. '나폴레옹'이 동물농장의 동물들을 교묘하게 배신했듯이, 공산주의는 권력이 대중을 가장 극적으로 배신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고, 대중의 권력 선택의 범위와 자유가 그 어느 때 보다 신장된 지금 대중은 권력의 봉사를 받으며 행복한가. 불행하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특히 우리 사회로 범위를 좁히면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권한과 권위 없는 권력과 권력집단이 너무 많아서다. 대중의 저항을 받았던 정권의 정보권력기관은 대중의 지지로 선택된 정권 아래에서도 이름만 바꾸어 가며 국민을 도청했다. 재벌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분산엔 관심이 없다. 오직 권력의 유지와 승계를 위해 대중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행정권력은 어떤가. 도장 찍을 권한만 생기면 어떻게든 대중을 알겨먹으려는 오리(汚吏)들의 기승이 가라앉은 적이 없다. 이런 권력에 저항해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대중 권력은 어떤가. 노조는 취업장사에 나서고, 전교조는 평가를 거부하는 선생님들의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이들 마저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턴의 정의를 증명하고 있는 건 참 우울한 일이다.
이렇듯 모든 집단의 권력화가 지금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하다 못해 권력의 언저리에서 금품으로 권력 브로커 행세를 하던 사이비 권력자가 제도권 권력의 본산인 검찰청에서 검사에게 호통 치는 판이니 대한민국 권력은 질서 실종의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여기에 준공영방송 MBC의 PD들은 순진한 과학자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수첩'을 채웠으니, 국민들은 언론 권력의 실체를 새삼스럽게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불행한 건 이 모든 권력집단들의 권력행사를 조정하고 통제해야 할 진정한 대중 권력, 즉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대중으로 부터 소외된 현실에 있다. 국민이 선택한 공식 권력인 노무현 정부가 허약해 우리 사회가 모든 권력의 준동으로 권력의 진공상태에 빠진 것이라면 정말 큰 문제이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노무현 정부를 권위있는 권력으로 세우기 위해 노란리본 매달기와 같은 대중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권력으로 거듭나기 위해 진지한 전환을 모색하든지…. 지금 우리 사회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중심권력의 복원을 고대하고 있다.
/윤 인 수 (논설위원)
모든 권력이 준동하는 위기
입력 200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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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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