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왕의 남자'를 보았겠지. 평생 광대를 자처하는 자네가 이런 영화를 놓칠 리 있나. 공길과 장생이 마지막 줄을 타면서 그러더군.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고. 자네 생각이 많이 났어. 참 잘 만든 광대영화라는 생각에 한참 객석에 앉아 있었다네. 왕남폐인들이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심리가 이해가 가더군. 관객이 벌써 800만을 넘어섰다지?
보고 와서야 흥미로운 평을 하나 발견했네. 어느 제작사 대표가 그랬더군. 10대와 20대는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보고, 30대·40대는 광대놀이로, 50대이상은 왕정극으로 본다. 재미있지 않나? 내 영화감수성이 나이에 딱 들어맞는다는 게 말일세. 탈춤 공연이 독재타도 시위로 이어지던 대학시절이 떠오르더군. 그 때 우리는 탈판의 신명이 데모의 전위가 아니라 그냥 삶의 신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지. '왕의 남자'는 그 세상에 한걸음 다가갔다는 증거일까 아닐까.
하여튼 왕남의 결정적 성공요인은 이처럼 다면적 감상이 가능한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정곡을 찔렀다고 보네. 대중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수성과 눈높이에 따라 즐길 수 있는 한국영화가 어디 그리 흔한가. 앞서 관객 1천만을 돌파한 두 편의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만 해도 단일한 주제와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 아니었나? 왕남은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영화일 듯하네.
어느 대학교수가 한국인들의 영화감상 태도를 관찰한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한국인들이 한국영화를 보는 방식과 할리우드 영화를 감상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거야. 국산영화는 비판적인 눈으로 보지만, 양코배기영화는 그저 즐긴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한국영화는 소수의 관객과 다수의 비평가가 객석에 앉아있는 셈이고, 할리우드영화는 그 반대라는군. 날카로운 지적 아닌가?
약간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왕남을 둘러싼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이 난비하는 것 또한 이런 감상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이. 영화를 즐기기보다 숨겨진 풍자코드를 애써 찾아내고 그걸 견강부회해서 이용하려니 객석에 앉아있는 동안 얼마나 골치가 아팠겠나. 하긴 미스터빈 시리즈를 보면서 정치적 은유를 읽어내건, 봉숭아 학당을 문명비판 코미디로 독해하건 관객의 자유겠지.
그러나, 멜로드라마/광대놀이/왕정극을 '광대정치 모노드라마'로 단순 비약시키는 건 너무 정치광대스럽지 않은가. 그것도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패러디 수준을 넘어서서 정색을 하고 정치풍자극으로 단정짓고 옴니암니 한다면 이건 또한편의 블랙 코미디일세. 물론 연산군이 일개 광대 앞에서 익선관을 내려놓고 “이따위 것 너나 가져라”라고 하는 대목 등은 분명 현실정치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분명하네. 이준익 감독의 전작 '황산벌'에도 현실정치 감각이 번뜩였던 걸 상기하면, 왕남 또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왕의 남자는 유시민' 식의 단세포적인 발상은 아니지. 그건 감독과 배우, 그리고 밥상을 차린 수십명의 스태프에 대한 모독일세. 또한 '억지해석'을 하자면 정반대도 가능하지. 왕이 뭐를 하려고 해도 '선왕의 법도'니 '종묘와 사직'을 들먹이며 '아니되옵니다'를 연발하는 세력을 통렬하게 조롱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통에 죽어나가는 건 광대와 백성들이고 말이야. 이건 현 집권세력을 옹호하려고 하는 발언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
Y! 다행히 한국 관객도 이제는 한국영화건 할리우드영화건 영화는 영화로 즐기는 태도를 갖게 된 듯하이. 걱정스러운 점은 스크린쿼터 축소가 왕남같은 영화의 토대를 허물어버리리라는 거야. 한국 영화판의 광대들은 또 위기를 맞은 셈이지. 일간 만나서 자네가 본 왕남 소감과 광대의 숙명에 대해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
/양 훈 도(논설위원)
광대영화와 정치광대
입력 2006-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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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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