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탈북여성의 수기를 읽다가 책장을 쉬 넘길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을 만났다. 자신이 남쪽에 내려와서 죽음을 강렬하게 느낀 순간에 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국경을 세 번이나 건너면서 데리고 온 아들이 남쪽의 초등학교에서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떨어졌을 때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단다. 유치원 시절부터 가르쳐온 아들의 피아노 실력도, 제법이던 글솜씨도 바닥을 헤매게 되자 자살의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이 심리를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굳이 이해하려 들자면 못할 것도 없다. 한 번 넘어왔던 두만강을 되돌아가서 둘러업고 온 아들은 그녀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지가지 없는 남쪽에서 하나 남은 희망이 무너져 가니 무슨 보람으로 살 맛이 났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어리석었노라고 뉘우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명치끝은 여전히 뻐근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또 읽어주고…그래서 아이를 미국 명문대에 진학시켰다는 광고가 떠오른다. 맹모(孟母)도 그렇게는 못했으리라. '어머니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강남 어머니들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는지 점검하기 위해 자신이 영어 수학 과외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중학교 신입생이 고교 수학을 '선행학습'해야 안심하는 사회의 어머니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여유 있는 엄마들은 맹모 따돌리기에 전력투구하느라 자신의 삶은 돌볼 겨를이 없고, 일하는 엄마, 가난한 엄마는 책을 읽어주고 또 읽어줄 겨를이 없어 죄책감을 강요당한다. 북쪽에서 온 엄마가 죽음을 생각했던 밑바탕에도 이런 강박관념이 어른거리고 있다.

여기서 '공교육 정상화' 따위 공자님 같은 이야기는 접어두자. 공교육은 분명 정상화돼야 하지만, 혁명에 가까운 교육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한 그 꿈은 실현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사 학부모 시민들의 노력은 소중한 것이고 더 강력하게 진행돼야 마땅하다. 다만 이 땅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목숨걸고 내달리게 만드는 '공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집중해 보자는 것이다.

'공부 이데올로기'는 '성공 이데올로기'의 변형 가운데 하나다. 한국인들은 '성공'하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성공이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매우 드물다. 지식사회가 어쩌고, 제 인생의 목표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 저쩌고, '모범답안'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경우는 많지만, 제 머리로 따져보고 고민해서 주관적인 확신을 세운 사람은 가물에 콩나듯 할 뿐이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는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 아홉살 짜리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입이 찢겨 죽었을 때 반공 이데올로기의 근거를 정확히 알아서 그랬던 게 아니다. 수출만이 살 길이다! '정말 그런가요'라고 묻는 자는 얼간이거나 붉은 물이 든 자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다. 공부? 성공? 야, 임마, 그런 거 따질 시간 있으면 영어단어를 하나 더 외워!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 성공 이데올로기의 모토다. 낙오자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좌절과 패배의식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삶, 다른 사회를 찾으려는 노력은 원천봉쇄된다. 민주화 덕분에 '꿈꾸는 자들'의 공간이 조금 열리기는 했지만, 행여 내 아이가 그런 몹쓸 데 휩쓸려 낙오자가 될까 부모들은 항상 노심초사해야 한다. 이들을 강력히 위로해 주는 것이 공부 이데올로기의 건재다.

오늘도 어떤 엄마는 꼴찌 자식 때문에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할 지도 모르겠다.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았어도 공부 이데올로기의 자장(磁場)은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부모들이 안타깝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