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大權)에 올랐거나 대권을 향해 뛰는 대권주자라면 무엇보다 교양과 인격부터 갖춰야 한다. 배울 것도 배우고 동서고금 책다운 책권도 좀 읽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존재 급 이유’까지는 몰라도 생각도 좀 할 줄 알아야 대권자 또는 대권주자로서 제격이다. 그래서 국가 미래의 대로가 어느 쪽으로 틔었고 역사란 무엇이며 좌향좌는 어느 쪽이고 우향우면 어디로 가는 길이라는 것쯤은 각성할 수 있어야 어울린다. 그런데 당랑거철이라고 했던가, 한 마리의 사마귀가 팔을 벌린 채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아 진로를 거꾸로 돌리려는 무지망작(無知妄作)을 우리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 않은가. 도무지 표리(表裏)가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라 겉과 속의 구분도 없는 소리만 해대는 역겨움이라니! 선현들이 사람됨을 가리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보자. 생김새(身)야 그림이 원래 그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말(言)은 어떤가. 대권자나 대권주자 누구를 봐도 진중하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하고 미덥지가 못하다. 교양(書)도 그렇다. 책권깨나 읽고 문자깨나 쓰는 인물은 눈을 씻고 봐도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라와 미래를 위한 크나큰 판단(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야스쿠니 참배를 고집하는 일본 총리를 가리켜 “고이즈미, 이 사람은 역사도 철학도 모르면서 공부도 안하고 문화적 소양도 없다”고 질타한 사람이 있다.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渡邊恒雄) 주필이다. 그것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랬다. 무라야마 전 총리도 1995년 8월의 ‘무라야마 담화’―‘역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아프고 매운’ 반성은커녕 뜨뜻미지근한 반성도 하지 않는 후안무치를 탓함이리라. 그러나 고이즈미는 문자라도 쓸 줄 안다. 지난 1월 국회 연설에서 ‘지사불망재구학(志士不忘在溝壑)’이란 말을 했다. ‘지사가 뜻을 이루기 위해선 길가의 도랑과 골짜기에 자신의 시체가 버려질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그는 또 ‘노부나가의 관(信長の棺)’이란 책을 신주처럼 받들어 읽는다고 했다. 노부나가라면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무장이다. 그러니까 그에겐 적어도 죽을 각오로 개혁을 한다는 기개가 있고 공자 앞에서 문자도 쓸 줄 아는 교양을 갖췄다는 얘기다.

작년 11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미·중 정상 오찬에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고상한 환영사가 길어졌다. 당나라 시인 사공서(司空曙)의 시 ‘고인강해별 기도격산천(故人江海別 幾度隔山川:옛 동무와 강해에서 헤어진 뒤 산 넘고 강 건너기 몇 번이던가)’를 읊는가하면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등비래봉(登飛來峰)’ 가운데 ‘불외부운차망안 지연신재최고층(不畏浮雲遮望眼 只緣身在最高層: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두렵지 않은 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기 때문이라네)’로 이어갔다. 미·중 관계가 어렵더라도 향후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멋진 비유였다. 그런데 오찬사가 마냥 길어지자 부시 대통령이 참지 못했다. “그만 밥이나 먹고 합시다.” 하지만 부시도 그런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폭군 마오(毛)를 알면 중국이 보인다”며 마오쩌둥의 전기를 열심히 읽었고 지난 1월 백악관을 방문한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까지 읽어 보라고 권유한 사람이 부시였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기와 조국에 해 끼치기(熱愛祖國 危害祖國), 인민에게 봉사하기와 인민을 배반하기(服務人民 背離人民), 성실히 신의 지키기와 이익만 쫓기(誠實守信 見利忘義) 등 ‘팔영팔치(八榮八恥)’를 엊그제 발표해 13억 입(口)의 화제가 된 후진타오 주석은 어떻고 2001년 7월 모스크바 대학에서 러시아어로 강연을 한 장쩌민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노어라면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푸슈킨의 시를 원어로 읊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독일어 실력도 며칠 전 헝가리 대통령과의 회담을 독일어로 할 정도다. 대권주자라면 교양과 인격, 서(書)와 판(判)부터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

/오 동 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