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태동한 시민운동=인천에서 시민운동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규정하긴 어렵지만 멀리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향토 사학자들은 그 무렵엔 오늘날 불리는 것과 같은 시민운동이라기보다는 '청년운동' 차원에서 활동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3·1운동이후 인천에서도 다양한 청년단체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청년단체론 '인천엡윗청년회', '인천이우구락부', '인천한용단', '인배회', '제물포청년회', '소성청년회', '인천소년회', '인천여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등이 꼽힌다. 먼저 이들 단체는 시민계몽 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중점을 두고 움직였다.
그러다가 정부수립후 2개월이 지난 1948년 10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천 YMCA가 창립됐다. 대한 YMCA 총무였던 미국인 Dr. Fitch의 후원으로 중구 신흥동 42에 회관을 구입하고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초대 이사장엔 제일장로교회를 설립한 이기혁 목사가 취임했고, 총무는 이재덕씨가 맡았다. 회원은 150여명. 초창기 인천 YMCA는 주로 영어강습, 반공강연, 극장공연 등의 활동을 펼쳤다. 아울러 피란민들을 위한 직업알선을 비롯 야간학교 개설, 한글교육 등의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메카'-인천=일제에 의한 강제개항후 항만하역 및 공장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인천은 국내 노동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아왔다. 노동운동을 빼놓고 인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개항장으로서 서구의 문물이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일제의 수탈물자가 인천을 통해 빠져나가면서 인천은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몰려든 노동자들로 붐볐다. 이때부터 인천은 국내 노동운동의 중심지 노릇을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조합원 55만명으로 국내 최대의 노동운동 단체로 군림했다. 인천 노동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또 있으니 인천항을 중심으로 하역작업을 하던 인부들로 구성된 항운노조가 바로 그것이다. 1946년 3월 발족한 항운노조는 인천부두노조(50년), 인천항만자유노조(58년), 전국부두노조 인천지부(61년)를 거치면서 현 경인항운노조로 맥을 잇고 있다.
지금은 1970~80년대 군사정권시절 온갖 탄압에도 불구, 상당수 업체들이 노조를 설립해 투쟁을 벌이면서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총 인천본부와 한국노총 인천본부가 지역 노동운동의 '양대산맥'으로 자리잡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고 있다.
◇지역 정체성 회복에 나선 시민운동=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인천 시민운동의 태동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시민과 함께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부터다.
199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비로소 시민사회가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게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얘기. 대표적인 사례로 선인학원시립화운동(92~94년), 계양산살리기범시민운동(92~94년), 굴업도핵폐기장반대운동(94~95년) 등이 꼽힌다.
이어 97년엔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改惡)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인천대책위' 구성을 계기로 50여개 시민단체가 참여해 '민주개혁을 위한 인천시민연대'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이를 전후로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경실련,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인천연대) 등이 잇따라 창립, 특유의 조직력으로 인천지역 '주류 시민단체'로 자리잡아 나갔다.
◇전환기를 맞고 있는 시민들과 시민단체=최근 해반문화사랑회가 펴낸 '인천지역 엘리트 정주의식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천지역 주요인사 900여명의 출생지를 분석한 결과 인천 34%, 서울 16%, 충청 14%, 전라 10.3%, 경기 10%, 경상 8.1%, 강원 3.3% 순으로 나타났다.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토박이' 출신보다는 '외지인'들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인천은 유입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이질적 인구 구성' 속에서 오랫동안 내적·외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