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실은 인천항 개항 이후인 1889년에 인천에 이주한 뒤 1946년까지 생활했던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의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란 책자에서 드러난다.
'밤이 되면 조선인들이 횃불을 켜들고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광희난무(狂喜亂舞)하는 일은 17,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하였다.'
고타니 마스지로가 쓴 이 글을 통해서 봐도 인천에서 일어났던 독립의 기운이 얼마나 충천했는지, 그러면서도 보복보다는 오히려 차분함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20세였던 이기인(80) 인천시노인연합회 회장도 이같은 사실을 증언한다. “일왕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있은 뒤로는 전국 어디를 가나 무정부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천에선 해방 2·3일 뒤쯤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치안자치대를 만들어 치안확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제복이나 무기들이 없었기 때문에 완장을 착용하는 것으로 치안대원임을 나타냈습니다. 특이할 만한 일은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자체방어에는 철저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일본인 거류지를 순시하기도 했으니까요.”
이 회장이 밝힌 치안자치대에 대해선 고타니 마스지로의 기억과 겹친다. 고타니 마스지로는 8월 17일에 조선인들에 의한 치안자치회가 인천에 구성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일본인들과 아무런 연락도 교섭도 없이 조선인들의 독립적인 입장에서 출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때 자치회장을 맡았던 김용규가 해방 5일 뒤인 8월 20일 고타니 마스지로를 만나 나눈 대화에서 인천의 자치회가 서울보다도 먼저 구성된 것임을 알게 한다.
김용규는 고타니 마스지로에게 “일본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며 쌍방은 원만하게 헤어져야 한다. 본 자치회는 현재 인천에서 단독적으로 설립한 것이지만 이후 경성에 중앙기구가 생긴다면 해산할 것이다. 아울러 본 자치회는 결코 정치 단체로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을 적으면서 고타니 마스지로는 그 자치회의 운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회장인 김용규가 아니라 좌익사상가인 인천 청년들이었다고 부연하고 있다. '인천 청년'들의 진보적 사상활동이 활발했음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인천엔 해방 1개월 이상이 지날 때까지 일본인 경찰들이 버젓이 활동했다. 고타니 마스지로는 9월 20일에 수야(狩野) 서장 이하 일본인 경찰관 350명이 해직되고 조선인 보안대원 163명이 새로 인천경찰원에 임명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허울 뿐인 조선경찰이었다. 이 때 임명된 조선인 경찰서장이 대표적 친일인사였기 때문이다. 신임서장은 김윤복(金允福)이었는데, 김윤복은 8월 17일 인천수탈의 대표적 상징기관인 '인천신사(神社)'에서 있었던 신체(神體·신사에서 모시던 신령을 상징하는 물체)를 숨기는 의식에 참여한 9명의 인물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9월 8일 중구 인천우체국 근처에서 있었던 미군 환영행사에서 일본경찰이 조선인 환영인파를 향해 발포하는 사건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환영인파에 섞여 있었다는 이기인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인천시민들로 인천우체국 부근 거리는 가득찼습니다.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경찰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질을 했습니다. 맨손으로 있던 시민들은 강제로 해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명의 우리 보안대원이 숨진 이 사건을 맡은 미군정은 일본경찰의 발포가 정당했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인천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9월 10일 인천시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이 시위운동으로 번진 것이다. 고타니 마스지로는 당시 장례식에 수천 명이 모였으며, 길거리마다 구경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고, 행렬은 시내를 줄지어 행진해 장례식장인 천주교회당을 들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이 장례식은 건국위원회가 주도했으며, 인천역광장에서 있은 연설에서는 '일본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이자'고 외쳤다고 한다.
미군은 인천에서 일본부대를 지휘했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중구 항구역 앞에 일본군의 자동차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른 부대는 모두 철수했지만 이 부대는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