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컨스피러시'라는 미국 영화가 수입되어 흥행된 적이 있다. 그 내
용인즉 거의 피해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항간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 사
고를 모두 국가기관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자신에게도 언제든
그 음모의 손길이 뻗어올 수 있다고 믿는 한 인물이 있는데 영화가 진행됨
에 따라 정말 그의 말대로 국가기관의 음모가 그 인물을 생사의 위험 속으
로 몰아넣기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컨스피러시 시어리 Conspiracy Theory, 즉 음모이론은 한갓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많은 미스터리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 현대사
도 이 음모이론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정국을 전후하여 일어
났던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정치지도자들의 암살사건들이 그 좋은 예가
된다. 그 동안 이들의 암살이 미군정하의 남한에서 헤게모니를 쥐려는 이승
만계의 공작의 결과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남한에
우익반공친미 단독정부가 수립되기를 원했던 미국이 이에 어떻게든 연루되
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도 늘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
니라 70~80년대로 내려오면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저격과 신군부에 의해 저
질러진 광주학살에도 미국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상당한 정도로 널
리 유포되어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음으로 해서 이러한 의심과
추측은 한갓 억측이나 유언비어로, 또는 일종의 근거 없는 미국혐오증으로
일축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의심과 추측이 미상불 공연한 과대망상만은 아니었음이 밝
혀지고 있다.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
(CIC) 소속 정보원이었음을 알려주는 문서가 최근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이
를 일전 우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인하여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안두희
는 백의사의 조직원이었고 그 백의사는 백범은 물론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
에 관여했으며 김일성 암살을 계획하기도 한 극우 테러조직이었다. 그렇다
면 백범의 암살은 물론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에도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
이 있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CIA를 비롯한 미국의 정보기관들
이 제3세계 국가들의 내정에 개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요인을 암살하거나
내전을 부추겨 왔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 일이 우리나
라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에게 미국의 음
모설은 망상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현실에 가깝다.
다른 일도 아닌 백범 암살에 개입하다니. 미국은 자신들이 우리 역사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과연 깨닫고나 있을까. 이러한 끔찍한 진실이 드러나
고 있는 지금도 미국은 자나깨나 우리의 우방이고 혈맹인가? 그들은 우리
를 냉전체제의 교두보로, 다시 그들의 패권주의의 볼모이자 경제식민지로
만들어 마음껏 농락하는 하나의 비정한 제국주의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힘이 약하고 복잡한 국제역학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
도, 적어도 우리를 한번도 사랑한 적 없는, 그리고 아마 우리로부터 복종
을 받으면 받지 사랑을 받아보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을 그들
을 짝사랑하는 비굴한 식민지 근성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은 잘 알면서도 우리에겐 마치 미국
은 '영원한 친구'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강박증이 있다. 무엇이 그
렇게 두려운가? 미국비판도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인가? 어쩔 수 없이 싫은
상대와 협력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협력은 협력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왜 그들이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의 잘못을 잘못이
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미국에 대한 노예적 짝사랑의 강박에 빠져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미국의 종속국가에 머물 것이다. '미국에 들어가고 한국에 나오는' 사람들
이 있는 한, 미국을 비판하면 미국관리들보다 먼저 쌍지팡이를 짚고 나오
는 얼빠진 자칭 우익들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땡볕 아래 미국대사
관 뒷담 꽁무니에 길게길게 늘어서서 하염없이 일개 미국 관리의 은총과 시
혜를 기다려야 하는 지지리도 못난 식민지 백성일 수밖에 없다. 꿈을 깨
자. 이 짝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명인(문학평론가·계간 '황
해문화' 편집주간)>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력 2001-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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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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