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대가 있는 대학도시 앤아버의 지역신문 앤아버뉴스 10월27일자에 따르면 미시간주 리빙스턴 카운티 청사 카페에서 흰 분말 설탕을 묻힌 도너츠가 사라지게 됐다. 도너츠뿐 아니라 대용 설탕, 커피 크리머 등도 함께 퇴출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카운티 위원회에 의해 내려진 이 조처는, 한 직원이 청사 건물 바닥에서 이상한 흰 가루를 발견해 911에 신고를 했는데 그 흰 가루가 누군가의 아침식사 도너츠에서 떨어진 것으로 판명된 해프닝을 계기로 취해진 것이다. 탄저병 공포가 확산된 상황에서 신고를 한 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너츠나 커피크리머 같은 일상적인 식품까지 금지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 토막의 코미디 같은 이 에피소드가 바로 지금 미국의 웃지 못할 현실이다. 리빙스턴 카운티는 29일 저녁(현지시간) 지역 고등학교 강당에서 주민들에게 바이오테러리즘(생화학테러)에 대한 대비 및 대응책의 윤곽을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탄저병 공포는 9월 11일의 테러에 의해 야기된 충격·불안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9·11테러는 미국 땅도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시민사회도 공격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줬지만 시민의 일상생활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던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이라는 미국 슈퍼파워의 상징에 대한 공격이었다. 테러 사건 직후 내가 아는 한 미국인 학생에게 가족이나 친척 중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더니 웃으면서 다행히 자기 집안은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좋은 집안이 아니라고 대답한 일이 있는데, 이 학생의 시니컬한 대답이 9·11사건의 상징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에 비해 이번 탄저병 파동은 테러가 일상적인 생활 영역에까지 깊숙히 파고들 가능성을 보여준다. 앞서 소개한 리빙스턴 카운티의 사례가(관청이라는 특별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어린이들의 최대 축제라 할 수 있는 핼러윈(10월31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많은 부모들이 이 행사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치러도 될지 걱정을 하고 있다. 핼러윈 때는 아이들이 여러가지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캔디를 얻어가는 풍습이 있는데, 그 캔디가 안전할 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로부터 1년에 한번 있는 축제를 빼앗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또 그런 선택을 할 경우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부모들은 당혹스럽다.
또 현재까지의 탄저병 감염 사례들은 우편물을 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사람들은 수상쩍은 우편물이 없는지 신경을 써야 하고 우편물을 만진 후에는 손을 씻으라는 권고까지 받고 있는 지경이다.
그러나 아직 시민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주요 건물의 일시적인 폐쇄가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되긴 하지만, 실제로 탄저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극히 적으며 감염된 사람도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다. 며칠 전 한국에서 “미국에 탄저병이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데 괜찮으세요?”라는 갸륵한(?) 이메일을 받기도 했으나, 현재 미국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은 탄저병 자체가 아니라 탄저병 공포이다. 지금 미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공포의 확산이며 그것이 바로 테러리스트가 노리는 바라는 소리도 높고, 그런 가운데서 시민들은 일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탄저병 공포는 그것이 모든 다양한 형태의 바이오테러리즘의 가능성을 생각케 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깊은 좌절감 때문에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9·11테러는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공격자가 구체적으로 제시된 데 반해(입증되었는가 여부는 별개로 하고), 탄저병원균을 침투시킨 테러리스트의 실체는 떠오르지 않고 있다. 공격자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으니 공격의 목적도 파악되지 않고, 이 바이오테러리즘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나의 관심을 끈 기사 중 하나는, 미국 내의 극단주의 집단(무정부주의, 반연방주의, 애국주의, 인종주의, 신나치주의 등)이 정보 및 치안 당국의 요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이은 테러와 그로 인한 시민사회의 혼란은 미국 내의 극렬 집단들의 준동을 촉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9·11테러와 뒤이은 탄저병 파동은 미국의 국제관계 혹은 대외정책에 관한 논쟁을 가열시킨 데 그치지 않고 미국사회 내부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국가·종교·시민사회 등에 관한 다양한 가치들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한영혜 (한신대 사회학교수 미시간대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