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은 세종(1397~1450)탄신 605주년 기념일인 동시에 스승의 날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주 영릉에서 숭모제가 열린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로서 묘소는 도봉구 방학동(당시는 경기도 양주군)에 부군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공주는 죽산(안성) 안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며, 족보에는 공주유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세종 임금이 정음창제시에 변성(變聲)에 대하여 매우 고심을 했다. 여러 대군(문종, 수양대군, 금성대군 등)과 공주에게 하문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공주가 명쾌히 대답을 했다. 이를 가상히 여겨 노비와 문답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서 나오는 변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세종은 왜 변성에 대하여 고심을 했는가? 더구나 기라성 같은 집현전 학자들을 제쳐놓고 왜 대군이나 공주에게만 하문을 했을까? 이 두 가지 의문은 정음창제의 감추어진 동기를 이해하는 핵심사항이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5개의 정음(ㄱ, ㄴ, ㅁ, ㅅ, ㅇ)과 반설(ㄹ)과 반치음(△)의 2변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정음이란 궁상각치우 5음을 말하며 음악적으로는 온음이라는 뜻이다. 온음 사이에 존재하는 반음을 변음(성)이라 한다. 이는 정음이 국악이론에 바탕을 둔 7음계로 창제되었음을 뜻하며, 음악적 자질을 갖춘 사람만이 창안할 수 있는 위대한 지적 소산물인 동시에 공주는 조역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정음의 창제사실은 세종 25년(1443년) 세종실록에 간단히 전한다. 그 이전에는 어떤 신하와도 상의하거나 자문한 기록이 없다. 집현전 학자들(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등)은 나중에 참여하여 응용과 활용에 공을 세운 정음세력과 최만리 같은 반 정음세력으로 갈린다. 사전에 상의를 했다거나 공동 연구작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단독 창제를 시도했을까?

훈민정음에서 훈민은 어린백성(愚民)을 대상으로 지식대중화를 겨냥했다는 것을 뜻한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무력 탄압에 의한 신권(臣權)의 제압으로 왕권(王權)을 확립하는데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방편이란 사실을 세종은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권의 신장만이 신권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탱할 수 있는 요체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3권 정립에서 왕권의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민권세력은 워낙 미미하여 신권의 대안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를 위하여 새로 28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할 따름이니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음창제는 지식대중화를 통한 민권신장으로 신권에 대응하고, 왕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기획된 궁정내부 프로젝트인 셈이다.

이를 간파한 사람이 최만리이다. 사대 논리로 반박했지만 기실은 민권 신장이 신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저의를 알아채고 거칠게 반발한 것이다. 그는 결코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침해에 저항한 옹졸한 기회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만리의 반대가 아니라 정음창제에 주도세력이었던 세조에 의하여 삼권정립의 구도는 결딴나기 시작했다. 세조는 도덕적 결함을 봉합하려고, 정음 세력을 탄압하거나 회유하면서 또 다른 반 정음 세력들과 결탁함으로써 세종의 구도는 허무하게 무너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런데 정의공주는 변음의 발견으로 정음창제에 공이 있지만, 그 남편은 세조 반정에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주의 아들은 단종의 편에 섰으니 역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려 하는 것일까? <진용옥 (경희대 교수 정보통신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