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으로 건물이나 지역을 가리키는데 ‘공간’이나 ‘장소’라는 말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그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장소(place)가 오래된 성터나 고향 마을, 전설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곳이라면, 공간(space)은 현대적인 건축의 내부나 합리적으로 구획된 영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장소는 우리에게 낯익고 정겨운 느낌을, 공간은 자유롭고 새롭지만 낯선 느낌을 받게 된다.
지방자치제 실시이전의 도시들은 모두 특색 없는 공간적 확장이나 구획에 머물러 있었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건 비슷비슷한 형태의 건물과 중구, 동구, 남구와 같은 기계적인 행정구역 명칭으로 구획된다.
지방화와 세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지방은 더 이상 임의적으로 구획된 지표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자립과 정치적 자치는 물론 문화적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많은 도시들이 잊혀진 도시의 역사와 유적에 관심을 집중하고 지역축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거나 관광자원의 개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표정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도시를 개성적이고 정서적인 장소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가운데 성공적인 사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도시의 발전계획들은 상투적이며, 창의적인 축제의 모델을 찾기도 어렵다. 도시를 둘러싼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수용할 준비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관광자원 개발이나 도시계획 분야에서의 시행착오는 훨씬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예산 낭비와 환경파괴를 초래할 뿐 아니라 도시의 개성화 전략에 결정적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환경파괴가 심화되고 모든 지역이 도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최상의 관광자원임을 확인하고, 최소개발이 최선의 개발이라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 유적이나 유물들을 복원하고 전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치밀한 고증을 통해 망각된 역사와 기억을 되살려내지 않고 즉물적 발상이나 일방적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낭만주의나 속된 향수에 호소하는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기억이란 달콤한 전설뿐 아니라 장소가 겪어온 고통이나 시련도 정당하게 환기시켜야 한다.
부평공원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군수물자 생산공장이었던 조병창이 있었던 자리였다. 당시에 식민지 민중이었던 한국인의 부녀자와 학생들이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또 다른 식민지를 침략하기 위한 군수물자를 만드는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던 비극적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장소였다. 그 흔적인 지하시설들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지만 조경공사 과정에서 깨끗이 '위생처리'되고 말았다. 부평공원은 아무런 기억도 환기시키지 못하는 도심 공원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월미도를 비롯한 중구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갖가지 개발 계획들이 쏟아지고 있다. 가뜩이나 월미도는 상업주의만 난무하는 어지러운 유흥지가 되어 있는 터에, 항만청과 중구, 인천시가 내놓은 계획들이 경쟁적으로 집행된다면 난개발의 표본이 되고 말 것이다.
월미지구의 재정비는 중요하고도 시급하다. 이 일대는 인천의 근대 문화유산과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방치되어 왔다. 만약 이 일대의 재정비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인천은 근대문화의 발신지였던 도시의 개성을 뚜렷이 회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침체된 중구와 동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어떤 '장소'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하고 합의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그 뒤에 개발의 순서와 방법을 정해야 한다. 만약 합의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뿐 아니라 다음 세대들의 몫도 남겨 둬야 하기 때문이다./김창수(인천학 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도시의 문화기획과 장소성
입력 2003-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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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1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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