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시대가 지나 후기산업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특히 지방자치시대에 살고있는 도시인들에게 고향은 무엇인가? 내 호적상의 본적지가 고향인가, 출생지가 고향인가, 아니면 주로 성장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인가?

선조들이 파주에 터전을 잡고 몇 대를 사신 까닭에 필자의 본적은 경기도 파주다. 서울에서 출생, 인천에서 2살 때부터 성장하여 이제껏 살고있지만,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산소가 파주에 있어 필자도 명절 때는 어김없이 그곳에 간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성장한 탓인지 필자에게 본적지는 항상 낯선 곳이었다. 비록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시골을 찾았지만, 고향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곳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는 친구들도 하나 없고 단지 몇 몇 친척들만 계셨다. 아마 아버지께는 고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살 때부터 인천에서 자란 필자로서는 항상 인천이 마음의 고향이었다.

필자처럼 아주 어려서 다른 도시로 이주했거나 이주한 지가 오래된 도시인들이 만약 지금 사는 곳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적지를 고향으로 생각한다면, 아마 우리나라 도시인들 대부분은 마음에도 없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시집가서 평생을 사는 새색시의 처지와도 같을 것이다. 이들이 본적지나 출생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사실 반길 고향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도시 사람들이 현재 살고있는 도시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질 못하고 낯선 본적지나 출생지를 어정쩡하게 고향으로 생각하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었는데도 아직 농경시대의 의식을 그대로 갖고 계신 부모님 세대와 공존하고 있는 사회구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이러한 부모님의 본적지를 들먹이며 다른 도시에서 출생하거나 자란 우리들을 마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사람인 양 교묘하게 본적지와 연계하며 유권자의 지지층을 넓히려고 그 동안 본적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치인들의 탓도 있다.

전원을 고향으로 갖고 싶어하는 우리의 꿈과 농경시대를 산 부모님의 고향을 교묘하게 엮어, 일부 정치인들은 1년에 한 두 번 가는 도시인들의 본적지를 마치 고향인양 도시인들의 머리 속에 담는다. 이렇게 해서 일부 도시인들은 너무 먼 곳에 고향을 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도시가 고향이 아니라면, 그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전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전통이 내포하고 있는 본 뜻이 더 중요하다. 농경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던 시대에 고향이란 개념에는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도시로의 이주가 없던 그 시대의 고향은 몇 세대가 대를 이어 터를 지키며 이웃들과 함께 사는 곳이기도 했고, 설령 이사나 출가를 한다해도 본적지나 출생지가 지금처럼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농경시대가 아니다. 전국민의 대다수가 이미 도시화된 도시의 빌딩 숲 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 도시인들에게, 옛날 농경시대의 논밭이 있던 두메산골이 고향일 수는 없다. 이미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자라난 대다수 도시인들에게 고향은 바로 살고 있는 이 도시인 것이다.

더군다나 지역의 주인이 되자는 지방자치시대에 우리 도시인들이 우리 도시에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이 도시는 영원히 소박맞은 색시처럼 될 터이고 모두 다 다시 시골에 내려가 살수도 없는 처지의 우리로서는 그나마 도시라는 고향마저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사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우리의 고향을 본적지의 전원처럼 푸르게 하고 싶다면, 우리는 본적지를 고향이라고 꿈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도시에서부터 나무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이흥우(해반문화사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