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는 날씨 덕에 점점 자주 몸을 움츠린다.
지난 여름 북한강변 국도의 중간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반원형 아치 구조물이 설치된 버스정류소에 한 노인이 노숙을 했다. 아침 출근길에 지날 때면 아직 잠자리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앞 북한강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맞으며 꽃향기와 새소리에 휘둘린 여름날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출근시간에 쫓겨 내달리는 필자로서는 여간 부럽지 않았다. 비라도 올라치면 우산살 한 두 개가 성치않은 두어 개의 우산으로 앞을 막고 한가로이 누워서 비를 긋는 모습조차 자연의 한 풍경처럼 다가오곤 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노인의 자취가 없어졌다.
쌀쌀해진 날씨에 문득 이 노인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록 홈리스였을망정 그 한적한 초록색 버스정류소에 누어있던 노인에게서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감이 엿보였던 것이다. 몇 년 전 배낭여행겸 떠난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홈리스들에게도 보았던 느낌이다. 아침 일찍 공원 벤치에서 부스스 잠이 깬 일본의 중년 노숙자는 마침 지나던 신문배달 자전거를 불러세웠다. 신문을 한 부 집어들더니 동전을 배달학생에게 건넸다. 그냥 주겠다는 학생에게 약간의 인상을 쓰며 기어코 동전을 들려 보냈다. 또 여러 겹의 옷을 껴입어 부풀려진 거대한 몸집과 깡마른 얼굴이 비대칭으로 익살스러워 사진찍기를 청하면 아주 인자한 모습으로 응해주던 베니스의 흰수염 길게 늘어진 노인 노숙자 역시 모델의 대가로 건네준 관광객의 동전을 예의 웃음으로 사양했다. 자신은 시 정부가 주는 돈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노숙자들에게 식사대접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담당자로부터 들은 얘기다. 서민경제에 주름이 잡힌 요즘 서울역 주변 노숙자가 더 늘어났다고 한다. 예년에는 날씨가 추워지는 이맘때면 겨울을 나기위해 쉼터로 들어가곤 했는데, 한 두 해 전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계속 한뎃잠을 고집해 올해는 노숙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쉼터행을 거부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조사해보니 가장 큰 이유가 '자존감을 상실케하는 쉼터의 운영제도와 분위기' 때문이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물론 그들 중에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이나 게으름이 원인이 된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이를 받침하는 금융제도의 구조적 희생자일 확률이 높다. 찬바람과 한뎃잠에 심신이 골병들고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갈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을 받지못할 바에는 차라리 길거리를 택하겠다는 비장한 선택을 헤아리지 못하는 복지정책은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우연히 보게된 길거리 식사제공 풍경은 처음 볼 때는 무료라는 것 자체가 마음을 위로해주는 훈훈함으로 눈을 가리지만, 여러차례 보게되면 이내 동냥 받듯 식판을 들고 비굴하게 줄지어 늘어선 비인격적 풍경으로 보인다.
필자는 매주 수요일 점심때면 가는 곳이 있다. 덕수궁 옆 성공회성당 뜨락에서 점심시간에 열리는 '주먹밥 콘서트’를 공동으로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먹밥 콘서트'란 행사장 주변 직장인들에게 주먹밥을 먹고 공연을 즐기는 대신 한끼 식사비를 기부하는 나눔활동을 독려하는 문화기획 공연이다.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도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기부문화에 대해 알려나가고 있다. 출연하는 가수들은 물론 주먹밥 재료를 제공하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행사장에서 안내하고 장내 정리를 하는 사람들 모두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다. 모두 함께 나누는 기쁨의 현장은 비록 짧은 한시간이지만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랑 체험으로 대도심의 삭막함을 녹여내고 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의 자존감을 생각해본다. 밥 한 그릇을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성을 공유하는 나눔활동을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김보성(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대학장)
찬바람과 노숙자의 자존감
입력 2004-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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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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