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보고 싶다. 학교 문을 나서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북적일 때는 생각나지 않던 무표정과 수다스럽기 그지없던 모습이 갑자기 보고 싶어지니 쓴웃음이 지어진다. 어쩌면 그간 아이들에게 냉소적이었던 것을 들켜 버린 것 같은 마음에서 나온 그런 웃음같다.
 
필자는 학교 안 자그만 주택에 산다. 혼자 사는 것이라 지금의 공간도 좁지는 않지만 내 소유의 잡동사니들을 제자리에 채우고 나면 그리 넓지는 않다. 분명 필자는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집을 채우고 있는 것을 모두 비우고 싶다는 마음을 여러 번 가져 봤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학교에 아이들이 없을 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은 것처럼, 아이들의 소리와 움직임이 창 밖을 가득 채우던 교정에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방학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변을 침묵시키고 있는 것 같다.
 
한 사회학자는 학교의 공간들이 붕괴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진리를 담아내는 공간, 추억을 기억하는 공간, 예의를 배우는 공간, 놀이공간, 휴식공간, 학습공간 등 다양한 공간들이 붕괴되어 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학교라는 전통의 공간이 붕괴되는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고민한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 어떤 묘책도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부모 욕심이 이미 나를 추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학은 조용함을 학교 교정에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런 방학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있었으면 한다. 세상의 진리를 위한 그 많던 활자들도 다 어디로 가고, 세상을 위한 외침의 말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던 모든 것들도 점점 보이질 않는다. 갑자기 외롭기까지 한 이 적막을 채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고, 무의식이 개입할 시간에도 기억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때나 드러내는 단어와 광고 문구들 제식훈련 받은 듯 정렬하여 내 눈을 막아서는 활자, 미인의 윙크, 맛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려는 색상과 카메라의 앵글 각도, 휴대폰 소리 등등 태어난 뒤 조용함과 침묵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은 그런 환경에 살고 있다. 친구를 만나도, 지인을 만나도, 처음 만나도 명함으로, 표정으로, 악수하는 힘의 세기 등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가슴을 가진 사람이 그립다. 조용한 사람이 그립다. 자기만의 언어와 냄새를 가진 사람이 그립다. 아니 독특한 사람이 그립다. 옷도, 대화의 소재도, 그리워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비슷비슷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살고 있다. 저마다 그들 또한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해 독특하다고 생각하는(실은 너무나도 유사한 것이지만)그 무언가로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를 주는 사람, 향기를 주는 사람이 그립다. 그런 세상이 그립다.
 
아이들이 떠나간 교정에서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학교라는 것이 이제는 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왜 아이들이 떠나간 뒤 ‘더 학교답다’라고 느끼는 것일까. 의문스럽다. 탐욕이 함께 교정을 나가서일까. 틀에 박힌 사고와 욕망들이 하교해서일까. 아닐게다. 내가 비로소 침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돈된 군상들 틈바구니에서 침묵의 맛을 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면 이 교정도 예전처럼 그렇게 북적거릴 것이고 아이들의 욕구와 의욕도 책상에 앉을 것이다. 하지만 흐름이 수반하는 소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매일 어떤 형태로든 아우성거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겠다. “얘들아, 이제 침묵을 배워가자”라고. /이상돈(천주교수원교구 신부, 효명중·고교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