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라는 말은 자연이 탄생한 이래의 세월만큼이나 비례해서 진부한 말일 것이다. 자연이 진부하다는 말은 바로 인간이 진부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온갖 행위는 자연에서 비롯되고 자연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근원에 대한 근대인의 동경과 그리움의 중심대상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자연이다. 자연은 고향, 어머니의 기호로 대변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을 향토적 터전으로 삼고 자연 속에 살면서 정말 자연으로 인간을 이끌어가고 싶어하는 한 지역의 면장과 하루를 같이 보낸 적이 있다.
 
며칠 전 충북 청원군 ○○면을 취재차 들른 적이 있다. 우연히 면장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면장은 친절하게도 손수 차를 운전하면서 처음 본 이방인에게 면의 모습을 자세히 안내하였다.
 
면내를 흐르고 있는 금강을 끼고 가다가 강원도 깊은 산을 방불케하는 산골짜기 입구에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내렸다. 진장골이라는 곳이었는데 산세가 험하고 나이 먹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면장은 이 곳에 인간과 자연이 접할 수 있는 한 계획을 세우고 있고 이미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10㎞쯤 되는 험로 사이에 마른 솔잎을 깔아 솔밭길을 내어 도시를 탈출하여 자연을 찾는 자들에게 맨발로 이 길을 걷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 지난 겨울 눈사태로 쓰러진 노송을 주워다가 주민 스스로 깎아 (다양한 의미와 전설이 담긴) 장승 400개를 세워 장승마을을 선보일 예정도 갖고 있었다. 이 모든 계획은 읍면 중심협의체를 구성해 면 단위로 예산을 나누어 주고, 그 운영을 면장에게 위임한 어떤 군수의 꽤 괜찮은 행정적 방침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면장은 면장의 능력껏 예산을 활용해 주민자치위원회와 손잡고 얼마든지 면장 중심의 일들을 계획하고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면장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자연, 자연이 보호받고 대접받는 그림으로서의 자연으로 끝나야 할 것인가? 또 인간이 그냥 한없이 자연을 놔두고 자연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갖지 않고 그냥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갈등이라고 했다. 인간과 자연이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이 더 이상 사악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환경 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 시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보다 사악하다. 그 이유는 출생할 때 제일 처음 자연물이 아닌 인공적인 것들 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출산할 때 새끼들을 자연 속에 떨어뜨린다. 풀잎이나 흙, 모래 속, 자갈, 물 속, 나무껍질, 그루터기 등등. 그러나 요즘 인간의 출산은 펄프를 화공약품으로 강하게 소독한 하얗게 질린 시트나 종이 위에 최초로 떨어져, 티슈로 눈물, 콧물, 침을 닦고 소독된 종이 기저귀에다 배설하며 자란다. 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인간을 메마르고 사악하게 만든다라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어머니들이 출산할 때에는 방에다 짚을 깔았었다. 아기는 무명 홑이불에 싸여 짚 위에 최초로 뉘어졌다가 어머니 품에 안겼던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모체로부터 분리되면서 무엇인가를 상실했다고 느끼는 원초적 결핍의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결핍을 보상해 줄, 대체해 줄 대체물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데 그 대체물은 어머니나 거울에 비친 그 무엇일 수 있다. 그 무엇을 자연에서 찾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루종일 도심 속에 사는 자연에 허기진 사람들에게 대체물로서의 자연을 접하게 하려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 촌부 같은 한 면장의 일하는 모습은 이 시대의 모든 면장들이 바라봐야 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최문자(협성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