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말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방문했다. 하노이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박정희 없는 70년대'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노이 체류 기간 중 바딘 광장을 돌아볼 기회가 주어졌다.

 하노이 바딘 광장의 오후는 평온해 보였다. 배드민턴을 치는 노부부, 청춘사업에 몰두하는 젊은 연인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떠들 권리와 의무를 타고난 듯 광장을 활개치고 다니는 아이들…. 광장 가운데에 위치한 호치민 영묘(靈廟)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바딘 광장을 서울 여의도 공원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1975년 4월30일, 자신의 힘으로 마침내 자유와 독립의 '공동체'를 건설한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바딘 광장의 오후는 그렇듯 평온한 나날의 풍경을 연출했다. 나는 이 광장을 보면서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 아니고 일상이다'라고 노래한 김정환의 시 '섬광과 참혹'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이 시는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문인들의 집회 현장에서 낭송된 작품이다.

 우리가 그랬듯이, 전쟁을 겪은 베트남 문학은 상흔(傷痕)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반레와 바오닌의 소설은 전쟁이 베트남 민족 구성원들의 영혼에 가한 깊은 외상을 일종의 망령문학의 형식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황석영의 '손님'과 김성동의 '풍적'을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참전용사' 출신인 이들의 작품 행간에서 공동체의 회복과 혁명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희생정신을 읽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들의 작품은 어떠한 명분의 전쟁이든간에 '아름다운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피(血)의 언어로 강렬히 호소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나는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전쟁을 겪은 베트남 민족 내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21살 PK1 정찰중대 소속 응웬꾸앙빈 상사(반레)와 실종자 수색대에서 일하는 끼엔(바오닌) 등의 작중 화자들은 황석영과 김성동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너무나 닮은 꼴의 유전인자를 가졌다. 무엇보다 이들의 작품을 관통하는 '비애'의 정서도 우리 작품과 흡사했다.

 그렇지만 칸트가 염원한 '영구평화'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지난해 2월말에 방문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쟁이 일상이 된 분쟁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자(Gaza) 지구 검문소 앞과 웨스트뱅크 지역의 마을에서 목도한 '벽(wall)'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나는 이 벽을 보면서 장벽이란 물과 콘크리트 그리고 철근의 물리적 배합에 의해서만 세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탓일까. 나는 이 벽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시와 소설은 '뿌리 내림'과 '저항'의 의미를 특유의 심오한 사유로 환기한다. 가싼 카나파니, 모하메드 다르웨쉬, 자카리아 모하메드…. 미국 CNN 화면과 신문 국제면에서 읽히지 않는 '진실'이 이들의 작품에는 응축되어 있었다. 예컨대 가싼 카나파니의 '하이파에 돌아와서'라는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노이와 가자 지구는 결국 우리 '한반도'에 대한 성찰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우리 한반도 주민들은 6·15 공동선언을 통하여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는 위정자들이 '선언문'을 낭독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공존의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때 문학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다고 본다. 문학을 통해 타자 이해와 타자 되기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민들이 서로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이 그리워진다. 베트남 시인 찜짱의 시 구절처럼, '기억하기 위하여…잊기 위하여'(임진강 앞에서).

/고 영 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