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까요? 사실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완성이면서 희생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씨에서부터 출발하여 많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열매들은 서로가 가장 단단하고 가치 있게 익어 있는 열매가 되기를 기원할 겁니다. 거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역에서는 '석과'라고 합니다. 큰 열매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열매를 다음세대를 위한 씨로써 사용합니다.

근데 평생을 열심히 노력해 가지고 큰 열매가 되는데 현상적인 입장으로 보면 이 열매에게 주어지는 것은 썩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그 속에서 새싹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열심히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것은 썩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 썩는 씨앗이 있어야 다시 싹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열매가 성숙해 가다가 '아이고, 좀 놀다가자. 어차피 나중에 큰 열매되면 썩는 건데.' 이런 생각하면 다음 세대를 위한 씨가 되지 못합니다. 근데 그 썩는 것이 자기 완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온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썩어가지고 이 우주를 살리는 겁니다. 그게 또 나의 완성이지요. 내 근원이 이 우주니까 태어난다고 그런 겁니다. 태어난다는 말의 본래 뜻은 타고 난다는 뜻입니다. 뭘 타고 났느냐? 우주의 생명성을 내가 타고 났다는 겁니다.

맹자가 사생취의(捨生取義·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지만, 비록 목숨을 잃을 지언정 옳은 일을 해야 함을 이르는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내 개인이 전체에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 뒤부터는 가치관을 바꿔야 됩니다. 사실 우리는 평상시에 살아가면서 자기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같은 울타리 속에 넣는데, 모르는 사람 50억 인구 중에 거의 대부분은 어떤 관계로 봅니까? 오늘날 세상은 경쟁자라든가 나는 나, 너는 너 이런 식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근원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스님이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란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평생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데 결국에는 가져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만하고 너는 내가 아니고 너는 나와 다르다고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격리가 되어 버립니다. 이게 근원적인 인간소외, 인격성의 상실입니다.

도덕원리의 발견은 바로 하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우주와, 그 인격성하고 떨어져 있는 무관한 존재라면 세상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어진 인생동안에 쾌락을 즐기다가 재미있게 살다 죽으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은 미물까지도 하나의 근원으로 돼 있는 것을 느끼면 동질성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 너와 나를 가르면서 이익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그런 식으로 변화하는 것을 화(和)라고 얘기합니다. 전체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게 되는 원리를 깨닫는 다는 말입니다. 존재원리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인의예지 사덕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인성과 지성을 근거로해서 예와 의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인성 즉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래성이고 우주의 본래성인 것이지요. 사랑이라는 씨앗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의미는 결국 하나일수밖에 없으니까요.

/김 태 형(인천 청뇌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