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바야흐로 익명의 시대인 것 같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웃에 노출되지 않은 채 아파트에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으며, 자동차 유리창 뒤에 몸을 숨기고 남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그재그로 초스피드를 즐길 수도 있으며, 인터넷의 익명 뒤에 숨어 차마 대놓고는 하지 못할 타인에 대한 폭언과 모욕의 말들을 뱉어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익명으로 되는 것은 꼭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서 또한 우리는 그 무리속에 숨어 익명의 상태로 될 수 있다. 이른바 `군중심리'는 이와 같은 무리속의 익명성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들을 일컫는다. 군중심리는 원래 구스타브 르봉(Gustav LeBon)이 프랑스혁명 당시 혁명군이 나타냈던 여러 폭력적 행동들을 분석하기 위하여 `The crowd'라는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심리 상태로 사람들이 군중속에서 흔히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극단적인 의식과 행동에 전염되어 가는 과정을 지칭한다.
 뒤에 다른 심리학자는 이와 같은 익명의 심리상태를 `몰개성화' 상태라고 명명하고,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우리가 평소에 지키고자 하던 도덕관이나 가치, 그리고 사회규범에 대한 의식과 책임감을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 집단 강간이나 테러는 집단속에서 익명으로 되어지고 자의식이 상실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익명의 상태가 항상 부도덕하거나 비합리적인 행동을 증폭시키는 것은 아니다. 익명이라는 것은 한편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이나 관계들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할 수 있고 그만큼 순수한 자기자신으로 되는 상태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느 가문의 후손이라든가 무슨 대학을 졸업했는지, 나이가 몇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누구의 남편·아내라든지가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익명의 상황에서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그만큼 자신을 둘러싼 여러 외형적 요소들에 근거한 편견과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만남이 될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의 대화가 이러한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집단속에서의 몰개성화 상태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거나 억압되어 있던 진한 감정이입을 체험하도록 하고 보다 솔직한 고백이나 감정표현 등을 풀어 놓는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는 익명성을 현실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익명성이 자아내는 효과 중 사회와 개인에 역기능적 측면에 대해 통찰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고, 보다 순기능적 측면을 돋우고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다.〈 김혜숙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