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판사, 재판관. 같은 신분을 나타내면서도 뉘앙스만큼 그 역할에 차이가 있다. 제 2의 IMF 위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지금, 법원의 파산재판부가 새삼스럽게 화제다. 정부와 금융감독원의 퇴출 기업 명단에 맞서 정반대의 결정과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담 뚜'의 공략대상이었다던 판사들이 이처럼 정치적 혹은 정책적 현안에 대해 전면에 나선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고 했던가. 현실을 짐짓 외면한 채 법관의 중립성이라는 그늘아래 안주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인권침해 사건이나 정권 안보용 조직사건들조차 번번이 권력의 편에 섰던 것이 법원이요 판사였다.
 돌이켜보면 인권침해에 맞서 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올바른 판결을 한것은 예외에 속한다. 물론 이 시점에서 법원 파산부의 조치가 어떠한 결과로 귀착될지를 예단하기 어렵다. 파산부의 결정이 정부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구조조정의 훼방꾼쯤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당기업이나 근로자들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 유리한가의 여부를 떠나 판사들이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전환점으로 보여져 신선하기 그지없다. 과거 법원이 인권보호를 위해 위기 때마다 결정적 판결을 했던 경험에 비춰본다면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의 보호에 대한 법원의 시각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법원의 의도여부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국민의 생존권과 기업의 재산권을 인권차원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기업의 퇴출과정을 보면 과연 납득할 만한 기준과 원칙 그리고 철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업에 대한 채권단이나 금융감독원의 통계적 자료나 예측이 옳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수 조원을 투자한 유형의 재산은 물론이고 수 십년을 키워온 기업의 숙련된 인력과 브랜드를 그렇게 허망하게 버려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과연 브랜드가치, 해외에서의 신뢰도, 해당국가와의 이해관계, 가족이 풍비박산될 상황을 생각했다면 그런 결정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묻고 싶다. 퇴출이라는 이 생소한 법 영역에 대해 우리들은 지난 3년간 얼마나 고민했던가. 구조조정의 이름으로 퇴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법원의 법정관리 실태나 문제점을 한번이라도 논의해 보았을까. 80년대 단행되었던 부실기업의 정리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 교훈이 무엇이었던가를 검토하였을까. 만약 기업과 가족의 삶의 터전을 인권적 시각으로 보았다면 어떠하였을까.
 법에서 원칙과 근본가치는 생명과도 같다. 그리고 그 원칙과 근본가치를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정신이다. 그 정신에는 과거의 땀과 현실에 대한 반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녹아 있다. 그것은 다국적기업의 이해나 시장의 잣대를 들이밀기에 앞서 인간과 가족의 근본가치를 지키려는 원칙이 우선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국민들은 법원이 과거처럼 권력의 이해를 중시하던 시대와의 단절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법관의 식견과 현장의 처절함을 함께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을 통해 법의 권위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왜 파산부의 결정이 인간다운 삶과 기업의 가치를 기본권으로 보려는 시도들과 연결되기를 기대하는가를 생각할 때다. 〈김민배(인하대 법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