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환희로 가슴 벅찼던 6월을 보내니 어느덧 7월이다. 2002년 6월, 단 1승만을 염원하던 우리에게 태극전사들은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거리를 뒤덮었던 신명나는, 빨갛게 물든 응원의 모습은 가슴 뭉클함과 함께 눈가를 따뜻이 적셔 주었다. 그런 엄청난 인파가 모였어도 불미스러운 폭력사건이 없었다고 하니 진정 우리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과의 예선전에서 우리는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등 힘든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여 동점으로 게임을 마쳤다. 동계올림픽에서 행해진 어처구니 없는 오노의 행태를 풍자한 골세러모니는 게임을 이기고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는 안정환 선수의 소감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미국에 대한 감정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한 판 승부에서 우리 선수들은 불타는 투혼으로 우승후보였던 그들을 결국 집으로 보내고 말았다. 사실 TV화면 아래로 보이던 작은 화면에서 폴란드의 우세를 보고는 마음 편히 게임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포르투갈과 비겨서 미국을 탈락시켜야 한다는 친구의 외침이 전혀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어느 샌가 나도 그리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과의 게임후 미국의 언론에서는 한국에게 지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는 보도가 있었으며, 우리가 포르투갈을 이겨 어부지리로 16강에 진출하게 되자 한국을 은인이라고 미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우호적인 보도형태는 다만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언론처럼 진실을 왜곡하는 편향적인 보도는 아니더라도, 동계올림픽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던 미국언론도 그에 못지 않게 자국중심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어찌 보면 언론도 애국적인 측면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세계의 초강대국이 보여주는 행태라는 측면에서는 참으로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심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 그동안 이스라엘에 베풀어준 호의는 핵무기의 보유여부를 떠나 너무도 일방적이었기에 아랍국가들이 느끼는 감정은 상대적으로 엄청난 박탈감과 위기감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사국인 우리의 의중은 염두에도 없이 나온 '악의 축' 발언을 비롯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다만 자신들의 이익에 필요할 때만 우방이 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

그렇게 월드컵의 열기로 뜨겁던 지난 6월 13일 양주군에서 꽃다운 소녀 두 명이 상상조차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보통 차량도 아닌 흔히 장갑차라고 부르는 운반용 궤도차량에 치었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군에 복무할 때 그런 차량을 운전했던 분들이 올린 인터넷 게시판에서의 글을 읽고 참으로 기가 막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것은 일어날 수가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사고를 낸 미군 2명이 지난 8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신변위협을 이유로 출두하지 않아 검찰조사가 무산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미군측은 검찰에 출석하겠다는 당초 입장을 바꿔 제 3의 장소 및 미군 영내에서 조사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검찰은 11일까지 미군과 협의해 출석조사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성사여부가 주목된다고 한다.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어찌 우리는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시위도중 뜯긴 철조망으로 밀려들어간 기자를 폭행하고 감금한 것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역사·제도적으로 구축된 한미간 불평등 관계와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바로 사건 해결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당국과 미국 행정부는 과연 자국 국민에게 하는 것처럼 동등하고 성의있는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한심스럽고 서글픈 것은 온갖 논란끝에 결국 우려대로 끝난 FX사업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최소한의 국민적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관료가 없다는 현실이다. SOFA협상이나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전환방식 등 많은 분야에서 왜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만 하는가. 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단호한 자세로 자국의 이익을 걱정하는 관료는 찾기 힘든 것인가. 똑똑하고 잘난 당신들, 우리에게 당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길 간절히 고대해 본다. 공허한 소망일지라도 희망이 없는 삶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아주 씁쓸한 심정으로 그럴 날을 기다려 본다. <수산 (대승원 주지)>